개심사의 진면목은 무량수전을 지나 명부전(冥府殿) 뒤 산신각에 올라 송림과 고목 사이로 바라보는 풍경이다. 한옥의 미는 멀리서 바라볼 때 찾을 수 있다.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사찰 전각의 지붕선이 푸른 자연과 어울려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가족처럼 어우러져 있다. 한국은 대부분 산지로 구성돼 있어 건축을 구성하는 공간이 크지 않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만 해도 그렇다. 청나라의 자금성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감은 크기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건물이 들어서는 인문·지리적 환경과 어울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미감을 보여줄 수 있다. 작은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한국의 미는 작고 단아한 아름다움이다. 사찰 건축도 마찬가지여서, 선종 사찰에 어울리는 명산의 명당, 승경에 아담한 건축이야말로 한국 미의 또다른 전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개심사의 건축적 아름다움은 의의가 크다.
―1장 자연에 녹아들다 <명산의 일부가 된 아담한 건축, 개심사> 중에서
퇴계는 도산서당의 완락재에서 혼자 한밤중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 한 가닥 상념이 자신을 파고들었던 체험을, “달은 밝고 별은 깨끗하며 강산은 텅 비어 있는 듯 적적하여, 천지가 열리기 이전 세계의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밝힌 적이 있다. 고요한 사색의 생활 속에서 그는 우주의 시원을 경험했던 것이다.
숭고할 정도로 아름다웠을 자연의 한가운데 한 점 도산서당이 앉아 있던 풍경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그 도산서당에서 학문과 독서로 노년을 보낸 퇴계 선생의 삶도 그려진다. 자신만의 우주에서 세상을 얻었으니 세상 어떤 것도, 세상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었을 삶, 이보다 멋진 삶이 또 있을까?
―2장 역사 속을 거닐다 <선비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는 도산서당> 중에서
경주의 서역인 자취를 찾아 흥덕왕릉(興德王陵) 가는 길, 6월 밤꽃이 늦깎이 꽃을 피워 연분을 진하게 흩날린다. 차가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을 넘으니 산하가 여름으로 가득하다.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서포항 인터체인지를 벗어나면서 풍경이 경주로 바뀐다. 흥덕왕릉 이정표를 따라 한가한 농촌 풍경 속에 허름한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이 신라 42대 흥덕왕(재위 826∼836년)의 능으로, 입구는 허름하다.
호기로운 서역 무인상보다 더 마음을 빼앗은 것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경주에는 소나무 숲이 유별나게 많다. 남산 삼릉골 솔숲도 그렇고, 괘릉의 소나무도 아름답다. 그뿐 아니라 불국사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앞 소나무는 말할 것도 없고, 다보탑 뒤로 보이는 소나무의 자태는 고색과 어울려 창연하다. 흥덕왕릉 솔숲 사이로 지는 석양빛을 받으며 한참을 오르니, 석양에 서역 무인상이 천년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노송을 배경으로 서 있다.
―4장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서역과 교류한 국제도시, 경주> 중에서
천보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면 화산의 아늑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삼아 단정하지만 당당하게 자리한 대웅보전을 마주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대웅보전은 정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가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고색창연하다. 천장에는 화려한 닫집에 용과 봉황 그리고 여의주 장식과 화려한 연등천장이 장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삼존불의 조각 솜씨도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당시의 조형답게 작지만 아름답다. 대웅보전은 그야말로 조선 후기 문화의 작은 보물창고이다. 대웅보전 앞마당 천보루 건물 위로 내리는 겨울 햇살이 따뜻하다.
정조의 갸륵한 효심 융건릉은 여주 영릉만큼 크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크기로 비교할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건릉처럼 엄청난 규모의 석수나 석인상이 없어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인간 본연의 마음이 닿아서이리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정조는 살아서는 생부 사도세자의 신원(伸寃)과 한을 풀어드리고, 죽어서는 자신도 부모 묘소 부근에 나란히 묻히는 천복을 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조의 갸륵한 효심에 숙연해진다.
―5장 선현의 정신을 배우다 <정조의 갸륵한 효심, 융건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