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대단히 바쁘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내 삶이 얼마나 허술하고 공허한 것인지를 자각하는 순간 나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간다면, 베트남에 가고 싶었다. 하노이의 하늘에 뜨는 별이 보고 싶었다.
스무 살 이래로 언젠가 한 번은 가 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라, 베트남에 처음 발을 디뎠던 순간의 설레임과 매혹을 잊지 못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대지는 인간보다 역사를 오래 기억한다. 25년생 이상의 산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고엽제, 나는 전쟁범죄박물관에서 보았던 포르말린 병 속의 기형아, ‘원 달러’를 외치며 뒤틀린 팔을 내밀던 호치민 거리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사행으로 흐르는 강과 산, 해안이 윤곽으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도(古都)에서 나는 눈을 감는다.
―18쪽
숙녀풀, 미모사의 베트남 이름을 숙녀풀이다. 스치는 바람의 손길에도 수줍어 움츠리는 그녀의 육체는, 우리가 볼일을 보기 위해 물건을 꺼내는 순간 이미 황급히 옷깃을 여미었을 것이다. 차로 돌아가던 운전기사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찡긋하고는 허리를 굽힌다. 벌린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미모사의 잎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린다.
―20쪽
괴테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마르크스에 의해서 생명을 얻은 바 있는 이 오래된 언어가 진실에 기대고 있다면, 20세기는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장 완벽한 상상력 속에 자신의 생을 던진 인간들에 의해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다. 20세기를 살다간 가장 매력적인 사람, 호치민. 그의 생이 남긴 흔적은 누구도 지워버릴 수 없다. 그의 생이 남긴 궤적이야말로 세기를 넘어 살아 있는 오직 푸른 생명의 나무 한 그루일지 모른다.
―31쪽
바딘 광장에 오면 모든 베트남 사람들은 엄숙해진다. 자신들이 호 아저씨의 사람들임으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간은 베트남 경제의 중심인 호치민 시로부터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바딘 광장, 베트남의 심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장경제의 물결에 휩싸인 나머지 육체로부터 고립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고립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5쪽
21세기를 서울에서 마흔의 나이로 살아가는 내게 남아 있는 기다림이란, 지하철역에서 내가 타야 할 다음 전철이 있을 때뿐이다. 지하철은 오 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죄악을 범하지 않는다. 설사 연착을 한다고 해도 나 이전에 누군가 난동을 부려줄 것이다.
아니다. 나는 기다림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기다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다. 기다릴 만한 어떤 것을 상실한 삶, 쓸쓸한 일이다.
―53쪽
빈둥거리고 기웃거릴 권리, 이 두 가지야 말로 여행자에게 주어진 양보할 수 없는 기본권이다. 세상에는 빈둥거리는 자만이 느낄 수 있고 기웃거리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
―66쪽
독수리의 깃털처럼 예리하고 맹렬하게 갈라져 나간 물길은 점점 비둘기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퍼지며 넓어져가, 마침내 옅은 무늬로 변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 무늬가 아이들의 발밑을 간지럽혔을까. 아이들 셋이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든다. 물결의 무늬와 함께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져갈 때까지 나는 마주 손을 흔든다.
―84쪽
훼의 거리에는 나라를 식민지로 내주고 11년간 왕릉을 건설한 왕조의 시간과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10평도 되지 않는 목조 주택에서 살기를 고집했던 호치민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를 습격하여 이성을 완벽하게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훼의 정체는 바로 서로 다른 기억을 하나의 공간 안에 사로잡고 있는 시간의 마술임을 레로이 거리 위에서 나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194~5쪽
스무 살 이래로 언젠가 한 번은 가 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라, 베트남에 처음 발을 디뎠던 순간의 설레임과 매혹을 잊지 못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대지는 인간보다 역사를 오래 기억한다. 25년생 이상의 산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고엽제, 나는 전쟁범죄박물관에서 보았던 포르말린 병 속의 기형아, ‘원 달러’를 외치며 뒤틀린 팔을 내밀던 호치민 거리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사행으로 흐르는 강과 산, 해안이 윤곽으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도(古都)에서 나는 눈을 감는다.
―18쪽
숙녀풀, 미모사의 베트남 이름을 숙녀풀이다. 스치는 바람의 손길에도 수줍어 움츠리는 그녀의 육체는, 우리가 볼일을 보기 위해 물건을 꺼내는 순간 이미 황급히 옷깃을 여미었을 것이다. 차로 돌아가던 운전기사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찡긋하고는 허리를 굽힌다. 벌린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미모사의 잎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린다.
―20쪽
괴테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마르크스에 의해서 생명을 얻은 바 있는 이 오래된 언어가 진실에 기대고 있다면, 20세기는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장 완벽한 상상력 속에 자신의 생을 던진 인간들에 의해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다. 20세기를 살다간 가장 매력적인 사람, 호치민. 그의 생이 남긴 흔적은 누구도 지워버릴 수 없다. 그의 생이 남긴 궤적이야말로 세기를 넘어 살아 있는 오직 푸른 생명의 나무 한 그루일지 모른다.
―31쪽
바딘 광장에 오면 모든 베트남 사람들은 엄숙해진다. 자신들이 호 아저씨의 사람들임으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간은 베트남 경제의 중심인 호치민 시로부터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바딘 광장, 베트남의 심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장경제의 물결에 휩싸인 나머지 육체로부터 고립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고립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5쪽
21세기를 서울에서 마흔의 나이로 살아가는 내게 남아 있는 기다림이란, 지하철역에서 내가 타야 할 다음 전철이 있을 때뿐이다. 지하철은 오 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죄악을 범하지 않는다. 설사 연착을 한다고 해도 나 이전에 누군가 난동을 부려줄 것이다.
아니다. 나는 기다림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기다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다. 기다릴 만한 어떤 것을 상실한 삶, 쓸쓸한 일이다.
―53쪽
빈둥거리고 기웃거릴 권리, 이 두 가지야 말로 여행자에게 주어진 양보할 수 없는 기본권이다. 세상에는 빈둥거리는 자만이 느낄 수 있고 기웃거리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
―66쪽
독수리의 깃털처럼 예리하고 맹렬하게 갈라져 나간 물길은 점점 비둘기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퍼지며 넓어져가, 마침내 옅은 무늬로 변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 무늬가 아이들의 발밑을 간지럽혔을까. 아이들 셋이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든다. 물결의 무늬와 함께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져갈 때까지 나는 마주 손을 흔든다.
―84쪽
훼의 거리에는 나라를 식민지로 내주고 11년간 왕릉을 건설한 왕조의 시간과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10평도 되지 않는 목조 주택에서 살기를 고집했던 호치민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를 습격하여 이성을 완벽하게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훼의 정체는 바로 서로 다른 기억을 하나의 공간 안에 사로잡고 있는 시간의 마술임을 레로이 거리 위에서 나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19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