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에 휩쓸려간 이름 없는 이 땅의 청춘들!
지옥과 같은 가혹한 세월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우정은 뜨거웠으며, 분노는 살아 있었다!
지상
나가사키를 뒤로하고,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지상은 걸었다. 조선으로 돌아간다. 나의 조국, 미움 속에서도 사랑해야 하는 나의 조국. 잃어버린 우리들의 나라로 나는 돌아간다. 내 아내, 내 아이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간다. 나를 기다리는 그들을 내가 껴안으러 찾아간다. 나는 이제 떠나올 때의 내가 아니다. 사요나라, 나가사키.
친일파 윤두영의 둘째아들로 형을 대신해 징용을 간다. 지상은 인간 존엄성이 말살되는 하시마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최악의 순간에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진정 옳은 것이 무엇인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깨달아간다.
우석
잊지 마라. 너 이렇게 살아야 한다. 많은 걸 미워해라. 분노가 있어야 산다. 차마 눈을 못 감게 미워해야 할 게 많아야 한다. 그러면 우린 다시 만난다. 그래, 그러자면 독하게 마음먹고 많은 걸 미워해야 한다. 그것도 목숨 부지하는 길이라는 걸 난 이 섬에 와서야 알았다. 사람이기에, 사람이기 위해서 싸우며 살 거다. 사람이기에.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태도로 하시마 징용공들의 구심점인 우석. 투사적인 일면 뒤에, 금화를 만나 비극적인 첫사랑에 빠지는 뜨거운 순정을 품은 사내. 사람으로서 무엇에 눈 감지 말고, 무엇에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서형
서형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뒤뜰을 둘러본다. 옻칠한 상 하나 꺼내서, 밤이면 맑은 물 한 그릇 떠놓고 빌면 되겠지. 일본땅이 아무리 험악해도 그렇겠지요. 별은 뜨지 않겠어요. 그래요. 우리 저 별을 봐요. 당신 있는 곳에 뜨는 별이나 여기 이 뒤뜰에서 바라보는 별이나, 별은 하나일 거예요.
훈장댁 막내딸로, 징용으로 끌려간 자신의 남자를 기다리는 조선의 여자. 남편을 보내고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지만, 남편에 대한 순정한 사랑으로 기다림의 고통을 견뎌간다.
금화
금화가 나자빠져 있는 됫병 술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병을 들어 술을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나는 여기 남아 있지만 내 마음은 그에게 안겨서 저 원한의 바다를 건넜다. 무엇에 빌 수만 있어도 좋으련만, 나는 어쩌다가 그런 것도 없이 살았나 모르겠다. 세상 살면서 어느 천년에 내가 어떤 남자를 위해 빌 일이 있을 줄 꿈이나 꾸었던가. 그래. 당신은 저 벌판, 흙이라고 합시다. 나는 그 위에 뜬 무지개로 살렵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몸을 버리고, 곡절 끝에 하시마의 유곽까지 흘러들어와, 독한 술에 의지해 살아가는 거친 들풀 같은 여자. 우석을 만나 생애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으며, 사랑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우석을 떠나보낸 뒤, 노무계에 잡혀가 끔찍한 고문을 겪고 몸도 마음도 황폐해진다.
동진
동진은 수감생활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점점 뚜렷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는 꿈꾸는 내일이 있다. 노동자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나아가야 한다. 무릎꿇고 살기 보다는 일어서서 싸워야 한다.
속 깊고 사리판단이 분명하며 신학문에도 밝은 그는 우석과 하시마의 폭압적 노동환경에 대항하는 의지적인 인물. 탄광 소요사건의 주범으로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된 뒤 자신의 삶을 노동자를 위해 바치리라 결심하지만, 원폭은 그의 내일을 잔인하게 짓밟는다.
명국
혼자라도 떠나라고 해야겠지. 여기 남아선 안 된다. 내 꼴을 보아라. 바로 내 꼴이 여기 남아 있다가 우리가 만날 끝이다. 눈물로 흐려오는 눈으로 명국은 벽 위로 나 있는 창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저 밖으로 나갈 것인가. 나가면…… 다리병신, 절뚝거리며 하늘을 보면 무엇 하며, 땅을 밟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시마의 징용공들이 믿고 따르는 큰형님 같은 사람으로, 사기를 당해 지옥섬으로 흘러들어온 기구한 남자. 현실에 순응하지만, 점차 하시마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탈출을 결심한다. 그러나 낙반사고로 다리가 절단된 채 잔류하고, 나가사키로 와 귀향의 그날을 기다린다.
길남
아버지. 전 여기서, 이 일본에서 뭔가 할 겁니다. 여기가 조선보다는 큰물이에요. 아버지도 늘 그러셨잖아요. 사람이 놀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그리고 전 말입니다. 봉황 꼬리를 할 바에야 닭대가리로 살 겁니다. 아시겠어요?
명국의 친구 장태복의 아들로 징용을 피해,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한바집 오야붕 육손이의 눈에 들어 부하가 된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끝까지 조선인의 편에 서지 않으며 혼란한 세상에 영악하게 처세한다.
[줄거리]
<제2부 분노의 밥>
이대로는 안 돼, 여긴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마침내 서형이 아들 명조를 낳아 남편도 없이 혼자 몸을 푼다. 득남 소식을 뒤늦게야 전해들은 지상은 탄광의 동료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고향생각에 잠기는 그들 사이로 구슬픈 아리랑이 흐르고.
길남은 일본땅을 전전하다 나가사키에서 지하터널 공사장을 관리하던 조선인 육손이의 부하가 된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뒤 하시마의 삶에 회의를 느끼던 명국은, 지상에게 조심스럽게 탈출을 제의하고 둘은 곧 의기투합한다. 어느 날 징용공 오광수가 일본가정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혔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무계에 끌려간 그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면서 탄광 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한편 작업 도중 지반이 무너져, 명국이 탄더미에 깔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결국 명국은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탈출 계획에서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