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는 희열을 선물할 수 있다면
우리 공동체의 일상을 융단 폭격해서 초토화한 계엄의 겨울 기운이 세상을 휩쓸 때, 나는『당신이 옳다』를 쓰고 또 쓰며 생생하게 나를 느꼈다. 그 시간은 내 삶의 항구에 나를 단단하게 붙들어 매줬다. 내게 필요한 마음이 이거였다고 말해주는 닻이었으며 나를 또박또박 문신처럼 아로새기는 거울이었다. 기괴하기까지 했던 그 미세먼지 자욱한 겨울을 지나며『당신이 옳다』는 내게도 ‘거울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도 거울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당신이 옳다』필사본을 핀셋으로 뽑듯 정리했다.
마침내 봄을 맞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수고하고 애쓴 우리 이웃들에게『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가 다시 ‘거울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다. 응원가처럼 위로처럼 격려처럼 존경심 돋는 우정처럼. 언젠가 어느 거리에서 혹은 봄꽃 같기도 사막 같기도 한 삶의 현장에서 조우하면 반갑게 끌어안을 만반의 준비가 나는 끝났다. 당신들도 그런 시간이길. 읽는 독자도 쓰는 독자도 모두 옳다.
마음이 허기질 때 밥 먹듯이 읽고 쓰다
손을 놓지 않고
바깥에서 친구에게 맞고 들어온 아이에게
엄마가 “누가 너한테 이랬어?”라며
아이 손을 꼭 붙들고 때린 아이를 찾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고 가듯 공감도 그렇다.
방향과 길을 잃은 상대의 말이 과녁에 분명히 도달할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상대의 손목을 절대 놓지 않아야 한다.
언제까지? 상대의 존재 자체를 만날 때까지.
그 말머리를 붙든 채 가야만
제대로 된 자기 이야기가 열리는 그 문 앞에 도착한다.
공감은 그렇게 시작된다. _ 141쪽
“누가 너한테 이랬어?” 누군가 내 손목을 잡고 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어봐 주면 두 다리 뻗고 엉엉 울며 일러바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 서러움을 견디고 버텨내고 오늘도 살아냈을 ‘나’와 ‘나들’을 온 체중 실어서 와락 안는다.
― <첫 번째 걸음_ 지금 옆에 한 사람만 있다면> 중에서
나에게 들어가는 문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_ 113쪽
그래서 말인데… 지금 마음은 어떠세요?
― <두 번째 걸음_ 나에게 들어가는 문, 감정> 중에서
우는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우는 어른들을 열렬히 응원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흘리는 부끄러움의 눈물이든 오래전에 손 놓았던 상처 입은 내 맘을 덥석 잡아주는 손을 만나서 쏟아진 눈물이든 아니면 두 마음 사이를 갈대처럼 오가는 자신에 대한 실망의 눈물이든 그 어떤 눈물이든 당신의 눈물은 옳다. 더 자주 더 많이 울라고 독려하며 나는 그 눈물들의 뒷배가 될 작정이다. 눈물은 서로 나뉘어져 있던 마음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보듬고 사랑스럽게 뭉치게 하는 힘이 있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 기어이 한집에 모여 살게 된 이산가족처럼 흩어졌던 마음 조각들을 하나로 감싸 안는다. 눈물은 접착력이 강력한 풀이며 용광로다. 울 수 있으면 희망이 있다. 우는 어른들을 볼 때면 나는 더 힘이 난다. 울컥 이게 사랑이구나, 이게 사람이구나 싶다.
― <세 번째 걸음_ 내 상처를 마주하다> 중에서
관계에서의 성찰은 나와 너 모두를 번갈아 가며 동시에 보는 일이다. 너는 상수(常數)로 고정해 놓고 나만 변수(變數)로 인식하는 건 성찰이 아니다. 너라는 존재에 대한 시선은 거두고 자신에게만 불을 켜고 살피는 일의 끝은 자책과 죄책감 지옥이다. 그건 성찰이 아니다. 오히려 성찰의 실패다.
과도한 자기검열은 나는 ‘내 탓’ 지옥에 빠뜨리고, 상대는 ‘남 탓’ 괴물로 만드는 길이다. 나뿐 아니라 상대방까지 망치는 나쁜 기운이다. 과도한 자기검열은 남 탓이라는 독버섯을 번성케 하는 최고의 숙주다.
나, 밀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오버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 밀리다가 밀리지 않으려고 오버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와 너 사이 균형점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 그렇게 시계추처럼 오가다 보면 알게 된다. 그게 나도 보호하고 상대방도 망치지 않는 자기 성찰이다.
― <네 번째 걸음_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 중에서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부모인 내가 자식을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난 사과했어”가 아니라
엄마인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하는지
아이가 느끼고 아이 마음에 스밀 때까지가 사과다.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붙들고 앉아서 다시 정확하게 사과해야 한다.
“엄마 맘이 이런 거야. 진짜야. 너한테 진짜 미안해. 그 맘만은 분명해.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뿐이야.” _ 295쪽
거기까지가 사과다. 진심으로 사과했는데 반응이 미지근하거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불만을 가지면 선을 넘는 거다. 내 사과, 내 진심을 수용할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상대의 몫이다. 그것을 강요하면 사과 안 하느니만 못하다. 심리적 폭력이 된다. 정확하게 최선을 다해서 사과하고 기다려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비로소 사과가 완성된다.
― <다섯 번째 걸음_ 공감은 함께 제자리뛰기> 중에서
일상이 무너지는 어떤 비상한 일(교통사고, 질병, 실패, 계엄, 이별 등)을 겪고 난 후 우리는 이전처럼 매일 일터로 출근하고 식구들과 가끔 함께 저녁을 먹는다. 주말이면 친구와 영화를 보거나 동호회의 일원으로 산악자전거도 탄다. 그러면 일상으로 복귀했다는 신호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겉모습은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아닐 수도 있어서다. 회식이나 취미, 운동 등 일상적 활동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일상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살아있는 것이 일상의 핵심이다.
― <다섯 번째 걸음_ 공감은 함께 제자리뛰기> 중에서
공감은 ‘나’에게 매몰되지 않고 ‘너’의 존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공감은 단순한 기법이나 기능적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집중 그 자체다. 공감은 논리적이든 감정적이든 가리지 않는다. 각 존재들의 개별성 그 자체에 대한 집중이라서 그렇다.
‘나’에게 머문 시선이 ‘너’에게 가닿을 때까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초조해할 필요 없다. 나는 안 되는 걸까 좌절할 필요도 없다. 내가 너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시로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다음엔 시간이 해결해 준다.
― <여섯 번째 걸음_ 걸림돌을 넘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