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기다린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기다려”
다른 논보다 두세 배 더 수확해도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마름인 봉식은 내가 열 섬을 거두면 열 섬을, 스무 섬을 거두면 스무 섬을, 백 섬을 거두면 백 섬을 가져갈 근거를 꾸며댔다. 내가 진 빚은 해마다 늘었고 그 빚을 갚으려면 더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 했다. 더욱더 열심히 농사를 짓더라도 빚이 줄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해결책은 내게도 농부들에게도 봉식에게도 박웅에게도 곡성 관아 아전이나 현감에게도 없었다. 한두 섬이라도 빼돌리고 수확량을 줄여 말하란 충고를 받았지만, 끼니를 잇기 위해 대부분 그런 속임수를 썼지만, 봉식도 소작농들이 그딴 짓을 하리라 여기고 모조리 빼앗으려 들었지만, 나는 줄이지도 빼돌리지도 않았다. 땅이 정직하듯 나도 정직하고 싶었다. 그 결과 찾아드는 굶주림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1-1 ‘성 이시돌’〉 중에서
“아가다예요. 제 이름.”
처음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아가다. 기이한 이름이었다.
“옛 이름은 아기랍니다. 이아기!”
이아기 아가다는 내 이름을 이미 알겠지만, 나는 그래도 또박또박 밝혔다.
“들녘입니다.”
〈1-1‘확독’〉 중에서
“이십사 년이나 탁덕을 보내달라 청하셨다면서요? 계속 거절당한 건가요?”
“거절은 아니오. 복된 말씀을 조선에 전하는 일을 거절하는 교화황이 어디 있겠소. 다만 우리나라에 들어올 탁덕을 고르는 과정이 하루 이틀에 뚝딱 되지는 않소.”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이십사 년 동안 단 한 명의 탁덕도 오지 않은 건…… 이상한 일 아닙니까? 회장님께서 직접 연경에 다녀오실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탁덕이 나설 때까지 버티며 기다리는 일이라면, 회장님이 적임자일 듯합니다만…….”
야고버 회장은 말을 아꼈다
“내겐 전라도에서만도 챙겨야 할 일이 너무 많소. 연경을 다녀오라 해도 감당하기 어렵지. 해오던 사람들이 하는 게 낫소.”
“계속 기다릴 겁니까?”
“기다려야 하오. 탁덕을 보내고 아니 보내고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기다리긴 기다리는데,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되오. 기다리고 있으니 할 일은 다 했다고 스스로 만족하진 말자는 겁니다. 교화황 성하와 청나라에 있는 주교와 탁덕 들이 자신들 형편을 살피듯, 우리도 우리 형편을 살펴가며 기다리자는 것이라오.”
〈1-2‘뚜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