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마. 돈에 얽힌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일어나.”
“큰돈 앞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작은 돈 앞에서는 작은 싸움이 벌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알겠어, 어떤 상탠지. 돈 중독에 걸린 전형적인 모습이군.”
냉정하고 예리해진 눈빛처럼 이태하의 목소리도 차가웠다.
“돈 중독……? 그래,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야.”
그 말이 귀에 익지 않은 눈치로, 박현규의 미세하게 달싹이는 입술은 ‘돈 중독’을 곱씹고 있었다.
“그래, 마약중독, 도박중독, 알코올중독, 니코틴중독만 있는 게 아니야. 독하기로 치자면 돈 중독이 제일 독할걸, 아마.”
“돈 중독이 제일……?”
정말 그럴까 하는 표정으로 박현규는 이태하를 쳐다보았다.
“다른 중독들은 남을 해치는 일 없이 스스로 허물어지고 망가지는데, 돈 중독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마구 죽여대니까.”
“응,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리고 말야, 소송 붙고, 재판 받고 하는 사건들 중에서도 돈에 얽힌 게 제일 많은 거 아냐?”
“당연하지. 민사고 형사고 가리지 않고 돈 때문에 벌어진 사건들이 99퍼센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이태하가 지겹다는 듯 콧등을 찡등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1권「어머니도 안 보여」중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이태하는 그 블랙리스트의 영향력을 실감해야 했다. 시쳇말로 ‘돈 되는’ 기업 쪽의 큼직한 사건들은 그야말로 씨가 마르고 말았다. 그저 이삭 줍듯이 자질구레한 사건들만 가지고 씨름해야 했다. 그런데 그 사건들의 거의 전부가 돈에 얽히고설킨 이전투구였다. 너 죽고 나 살자는 그 막가는 싸움판을 도맡고 나서서 칼을 휘둘러야 하는 변호사라는 신세에 이태하는 문득문득 감당하기 어려운 회의와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정기적으로 엄습하는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허둥지둥 진통제를 털어 넣곤 하는 것처럼 멀리 있는 한 선배를 떠올리고는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지치지 말고 성실히 합시다.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이루어져 나아가는 것이 기쁨이고 보람이고, 진정으로 행복한 자족적 삶이 아니겠소. 그 길을 향해 우리 함께 지팡이가 됩시다.’ —1권「큰 싸움, 작은 싸움」중에서
이태하는 월세를 4배로 올려 받으려고 하는 건물주의 탐욕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그렇게도 무도한 욕심을 부리다니……, 처벌법이 없어서 그렇지 그 무
도함이 바로 죄였다.
‘돈……, 돈……, 돈은 무엇인가…….’
이태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보다 훨씬 더 자주 회의에 빠지는 그 물음을 또
곱씹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물음이 그렇듯 돈에 대한 물음에도 선명한 답이 없었다. 아니, 이런저런 답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것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정치와 종교가 인간 세상의 2대 필요악이라는데, 돈을 더해서 3대 필요악이 아닐까…….’
이태하는 전에 가끔 했던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1권「월세 4배 올려 받기」중에서
“교단 끝에서 휙 돌아선 교수가 칠판 빈 데다 쓰기 시작했어. ‘돈은 인간에게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다.’ 이렇게 쓴 교수가 돌아서더니 ‘오늘 강의는 끝!’ 하고는 강의실을 나갔어. 다른 것들과 달리 아무 부연 설명도 없이. 그때 모든 학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칠판의 그 짧은 문장에 박혀 있었어. 그 한 줄의 문장은 학생의 질문만큼 도발적이고 신선했거든. 그 처음 듣는 말에 학생들은 묶인 채 침묵은 꽤 오래 계속되었어. 학생들은 돈과 실존과 부조리와의 상관관계를 따지고 파악해 보려고 헤매고 더듬거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다가 누군가가 침묵을 깼어. ‘그거 그럴듯하네.’ 또 누군가가 ‘어렵다, 어려워’ 하며 일어섰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고, 골치 아프다. 실존이든 부조리든’ 하며 자리를 떴어. 그다음부터 그 교수는 실력파라고 소문이 나게 되었지. 그리고 내 기억에 대학 4년 동안의 강의 중에서 그날의 강의가 가장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세상을 살아갈수록, 돈에 얽힌 재판들을 해나갈수록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어.”
— 1권「돈은 인간의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다」중에서
회장의 지시로 해피에게 저녁을 주고, 똥을 치우고, 뒤까지 닦아주었다. 그런 개 새끼 뒷바라지에 전진혜는 배알이 뒤틀리고 있었다.
회장이 9시 뉴스를 볼 때 다시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 10시에 회장을 침대로 옮겼다.
전진혜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 미뤄둔 계산을 시작했다. 한 달에 10만 원씩 저금해서 15억이 되려면? 볼펜으로 또박또박 적어가며 계산을 하고 나서 전진혜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계산을 했다. 틀림없이 맞는 답이었다. 1,250년이 걸려야 15억이 모아졌다. 1,250년!
‘1,250년이 걸려야 모을 수 있는 돈을 단숨에 차지할 수 있다니!’
전진혜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벌떡벌떡 뛰는 걸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어떻게 해서든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새롭게 결심하고 있었다.
—2권「개보다 못한 사람」중에서
“그러자 한암 큰스님께서는 온화한 웃음을 넉넉하게 지으며 말씀하셨소. ‘돈을 씀도 그와 같이 하면 되지 않을까 싶소. 돈을 꼭 써야 할 때는 손바닥을 쫙 펴 흔쾌하게 시원하게 쓰고, 아껴야 할 때는 주먹을 꽉 쥐어 철저하게 야무지게 아끼는 것이오. 그런 분별을 갖게
되면 주위 사람들도 입을 가볍게 놀리지 못할 것이고, 더러 입 놀리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
도 내 주관만 뚜렷하면 전혀 신경 쓸 것이 없소. 줏대 없고 내공 없는 사람들일수록 남의 얘기 하기 좋아하는 법이니까.’ ‘예에, 큰스님 말씀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그 신도는 벌떡 일어나 한암 스님께 큰절을 세 번 올리고 물러갔다는 얘기요.”
— 2권「□□은 □의 노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