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과 경제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달러의 힘을 알아야 한다!
달러는 세계의 금융과 경제를 움직이는 혈액으로, 그 흐름이 막히는 순간 큰 위기를 동반한다. 달러의 발행국인 미국은 달러를 무기화해 정치적,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을 펼친다. 외환위기는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직면했던 일이고, 언제 또다시 경험할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글로벌 기축통화로서 여러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기까지 달러의 역사가 어떠한지 알아보고, 현재 달러 체제가 작동하는 모습과 그 미래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달러 중심의 글로벌 금융 체제하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체제부터 정확히 이해해야 한국 금융과 경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외환위기 같은 극단적 상황에 또다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달러 체제가 세계 경제에 작동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한편 달러는 국제 정치의 한복판에 있어서, 미국 중심의 서방 세력과 중국, 러시아 중심의 대항세력 간의 지정학적 대결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대결의 결과는 달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시 말해 달러의 힘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 <들어가는 말>
중 2018년 12월 1일,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서 40대 중국인 여성이 체포됐다. 그는 홍콩을 출발해 멕시코행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의 이름은 멍완저우(孟晩舟), 중국 최대의 통신장비 기업인 화웨이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이자 부회장이었다.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의 딸이기도 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인물이었다. 멍완저우는 2009년까지 캐나다 시민권자였으며 밴쿠버에 두 채의 저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은 캐나다 측에 그를 체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 당시 화웨이는 최첨단 5세대(5G) 모바일 통신장비의 선두 기업이었다. 미국은 사이버 안보를 이유로 자국에 화웨이 제품이 들어오는 것을 제한하고, 영국과 호주 등 동맹국에도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등 화웨이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중(對中) 압박 수위를 높이려는 것이었다. ─ <1장 무소불위의 화폐, 달러의 위력> 중 1862년 2월 25일, 링컨은 의회를 통과한 법정통화법에 서명했다. 이 법으로 미국에 불환지폐가 도입됐다. 금속화폐와 무관하게 오로지 국가의 권력만을 근거로 한 화폐가 창출되었다. 이는 제2차 미합중국은행 폐쇄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이기도 했다. 이 지폐는 뒷면이 녹색이라서 ‘그린백(Greenback)’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링컨 달러’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린백은 금에 비해 2% 할인된 금액에 거래되었다. 가치는 계속 하락했고, 연말 즈음에는 1달러 금화 대비 1달러 그린백의 가치가 겨우 75센트에 불과했다. 1862년에 북부 물가는 12% 상승했는데 이는 그린백의 영향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린백은 순기능이 더 컸다. 북부연방 정부 재무부는 병사의 월급 지급과 군수품 구입에 그린백을 사용했다. 북부연방 정부의 신용이 올라가 더 좋은 이율로 돈을 빌릴 수도 있게 됐다. 사용 가능한 화폐가 마련되자 은행도 활력을 찾았다. 그린백은 절박한 시기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 <2장 식민지 핍박 속에서 피워낸 미국의 화폐제도>
1802년, 뉴올리언스 주재 스페인 총독은 스페인이 프랑스에 이 지역을 반환하기로 한 약정을 이행하기 위해 미국 선박들의 뉴올리언스 항구 기항을 금지시켰다. 이 조치는 미국 경제에 치명타를 가할 것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 통상물량의 약 3분의 1이 미시시피강을 통해 수송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뉴올리언스가 프랑스 같은 비우호적 세력의 손에 넘어간다면 미국 물류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미시시피 수로가 막힐 위험이 있었다. 미국 선박의 자유출입권을 보장받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고심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이 지역을 반환받기로 한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일대의 땅을 매입하거나, 미국 선박들의 뉴올리언스 항구 이용권이라도 얻어내고자 했다.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이끄는 미국 사절단에게서 방문 목적을 들은 나폴레옹은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 지역 전체를 사라는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당시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치르는 전쟁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먼로는 그 제안을 기꺼이 수락하고 가격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몇 번의 논의 끝에 1,500만 달러로 매입 가격이 정해졌다. (……) 이렇게 해서 북아메리카의 중심 세력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 <4장 미합중국은행을 둘러싼 권력 충돌, 은행 전쟁>
전후 유럽 은행가들의 고민은 전 세계에 금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라 금이 미국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1923년, 미국은 국가 경제 운영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초과한 약 45억 달러의 금을 보유했다. 이 중 약 4억 달러를 주화 형태로 유통하고, 나머지는 연준과 재무부 금고에 보관했다. 이런 미국에 비해 유럽, 특히 영국과 독일은 만성적인 금 부족에 시달렸다. 전쟁 전에는 30억 달러 상당의 금을 기초로 운영됐던 유럽의 세 대국에 남겨진 금의 양은 고작 절반 정도였다. 금에 대한 수요가 계속되자 유럽의 중앙은행들은 여러 조치를 취했는데 유통 중인 금화를 회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금화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미국뿐이었다. 당시 전 세계 금본위제 체제는 마치 한 플레이어가 거의 모든 칩을 차지한 포커게임과 같았다. 그런 상황에 놓인 게임은 계속되기 어려웠다. ─ <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달러의 도약> 금융위기가 한국으로 번지자 미국 재무부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무너져서는 안 될 방화벽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당시 가장 최근에 OECD에 가입했고 세계 경제 순위는 11번째인 국가였다. 한국이 무너지면 자칫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은 전 세계에서 미국만이 이렇게 크고 중요한 이슈에 대처할 리더십이 있다고 믿었다. 일본이 한국의 긴급 대출 요구를 거절하자, IMF가 관여했다. 그러자 미국 재무부에서는 즉시 립튼을 서울로 보내 협상 과정을 모니터링했다. IMF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처음에는 약 3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플랜을 생각했다. 주요 조건으로는 긴축정책과 종금사의 폐쇄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 재무부는 더 큰 구제금융 패키지를 제공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구제금융은 두 배 가까이 증액됐다. 대신 미국이 조건을 걸었다. 미국은 IMF 협상을 기화로, 1990년 미국과 한국의 금융정책회담이 시작된 이래 한국이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들었다. ─ <12장 금융국제화의 직격탄을 맞은 한국의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일부에서는 달러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의 과도한 특권이 빚어낸 참극이라는 시각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달러 기반의 금융 시스템이 중차대한 위기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도이치은행, BNP파리바 같은 유럽의 거대 은행들이 연준에 의존해서 위기를 극복했던 사실과 연준이 유럽중앙은행에 제공한 거대한 스와프라인을 떠올리면 달러 중심 체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필요하다. 21세기 초의 달러는 더 이상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에 근거하여 지배적인 위상을 구축한 것이 아니었다. 글로벌 달러의 기초는 민간 금융시장 네트워크였고, 이는 월가와 런던시티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거대한 유로달러 시스템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미국과 유럽의 금융계가 공동으로 만든 것이다. 2008년 가을에 발생한 금융위기 사태는 달러의 상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 중앙은행의 기축적 역할을 극적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달러는 힘이 약화된 게 아니라, 연준의 대응으로 글로벌 달러로서 새로운 위상을 획득했다. ─ <13장 연준, 최악의 금융위기에 글로벌 최종 대부자 되다>
민간이 자유롭게 통화를 발행하도록 하자는 하이에크의 주장, 즉 ‘경쟁하는 사적 통화’는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2008년 11월 1일 리먼브라더스가 몰락한 지 불과 몇 주 후, 익명의 인물인 나카모토 사토시가 온라인 게시판에 전자 크립토통화, 즉 비트코인을 제안했다. 가상화폐의 신비로운 주창자와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처음부터 새로운 전자화폐를 금처럼 희소성을 지닌 디지털 골드로 구상했다. 하이에크가 국가로부터 화폐를 탈환하려 했다면, 비트코인은 화폐로부터 국가와 은행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이는 신뢰가 무너진 시대의 화폐였기에, 인간 사회의 신뢰에 의존하지 않는 전자거래 시스템이 중심을 차지한 점이 특징이었다. 이처럼 인간 불신과 이성의 취약성이라는 어두운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비트코인의 배후에는 시장이 운영하는 사적 화폐의 우월성을 강조한 하이에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하이에크는 화폐 민영화의 이상적 도구로 은행을 상정했지만, 나카모토 사토시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은행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오염되었다고 여겼다. (……) 은행들은 정작 어려운 시기에는 중앙은행에서 공적 지원을 받거나 국유화됐다. 이에 실망한 나카모토 사토시는 탈국가화되고 민영화된 21세기의 화폐는 은행 시스템 밖에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이에크의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열망은 비트코인에서도 강하게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채굴(mining)’이란 표현이 암시하듯, 금속화폐 시대를 그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 <14장 유럽 재정위기와 더욱 공고해진 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