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의 사상은 식민지 시대와 권위주의 시대를 몸소 겪은 진보적 지식인이자 정치인의 고민과 투쟁을 담고 있다. 냉전체제하에서 등장한 남한의 군사독재와 북한의 전제정치를 경험하였고, 서유럽과 동유럽의 대립적인 사회체제 간의 경쟁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의 확대를 위한 정치적 실천을 주도하면서, 진보적 정치인 김철의 사상은 형성되었다. 그럼으로 김철의 사상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 진보적 정치운동의 역사적 유산이다. 한국의 진보운동이 역량을 축적해 가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유산을 제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김철의 사상은 박정희에 의해서 둘러쳐진 한반도 남쪽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 국제적인 민주적 사회주의 사상이었으며, 동시에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민족적인 사상이었다.
― 신광영, 「김철 사상의 현재적 의미」 중에서
김철은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념적 대결구도를 깊이 의식하고 자신의 사상을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곤 하였다. 이 용어는 자신이 분명히 반대하고 있는 공산주의를 ‘독재적 사회주의’ 혹은 ‘전제적 사회주의’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차이를 분명히 하는 말이었다. 선생은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표방하면서도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이런 독재정치를 반대하고 정권이 교체되는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말함으로 그 차별성을 분명히 했고,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해지려면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하면서 민주화야말로 사회주의운동의 선결 과제라고 주장했다.
김철의 사상은 먼저 개인의 주체성과 한계를 인식하는 인생관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사상, 민주주의 사상, 사회주의 사상 그리고 평화통일 사상으로 압축할 수 있다.
― 이만열, 「당산 김철의 생애와 혁신운동」 중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서의 민주사회주의를 한국이 나아가야 할 이념적 지향이라고 본 당산 김철 선생은 ‘노동’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가? 그에게 노동은 생계 수단이자 삶의 활기요, 복지사회의 토대였다.
“(…)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근로하도록 힘써야 하며, 우리의 복지가 근로의 결실로서 성취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동은 (…) 모든 생산과 창조의 원천이요, 사회발전의 원동력 (…).
1961년에 창당되었다가 5・16 쿠데타로 해체된 뒤 1965년에 재창당된 통일사회당 노동・복지정책 분야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노동법 전면 개폐, 노동자 농민 단체 정당 가입 보장,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부녀・연소 노동 보호, 유급 휴가제, 부당노동행위 엄벌, 국영기업 노동자 경영 참여, 노동금고, 완전고용 및 실업보험, 사회보장, 의료보험, 공영 임대주택 건설.”60) 또, 1981년에 창당된 사회당의 노동정책도 유사하다. “노조의 자주적 활동, 노동자의 경영 참여, 산별 노조 체계화, 최저임금제, 근로기준법 강화.” 이런 맥락에서 국가의 존립 이유 중 하나도 일하고 싶은 대중들에게 ‘근로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당산 김철 선생은 ‘민주사회주의자’로서 당연하게도 노동자, 농민, 실업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열망했다.
― 강수돌, 「김철의 경제•노동 사상」 중에서
김철의 통일 방법론은 객관적 정세와 주체적 태세의 상관관계에서 파악하는 동태적 방법론이다. 따라서 그의 통일관은 체제 고정적 해결책이 아니라 체제 변화적 해결책으로서의 통일 방법을 요구한다. 일방 변화적 흡수통일이 아니라 쌍방 변화적 및 체제 발전적 통일 방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가 바라는 통일된 민족국가는 기존의 국가의 연장이나 확장이 아니라 ‘제2의 해방’을 이룬 새로운 민족국가인 것이다. 요컨대 동서 냉전의 분단체제가 발전적으로 극복된 세계적 평화 국가인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이 지양된 새로운 공동체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바, 김철의 통일관은 그의 사상과 정치활동의 전모를 파악하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로서 작용한 것을 확인했다.
― 홍을표, 「김철의 한반도 통일관」 중에서
김철의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의 업적과 성과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유신독재하의 인권탄압과 정당 활동의 어려움은 물론 남북분단의 문제를 국제적 관심사로 끌어올리고 이 과정에서 SI와의 동지적이며 연대적 관계를 만들어낸 점이다. SI의 정치 문화는 전통적으로 유럽중심주의적이었다. 여기에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SI 내에서 아시아적 관점과 아시아 정책을 새로이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점을 두 번째로 들 수 있다. 셋째로는 역으로 국제 세계의 정보를 국내에 소개한 점이다. 90년대까지도 국내 저널들은 미국이나 일본 외에는 여타 세계에 대하여 폐쇄적이거나 무지한 상태였다. 김철은 국제정치의 변화상 특히 유럽 세계와 더 나아가 아프리카와 아시아 저변의 문제까지를 망라하여, 이를 분석적이며 상세하게 소개하여 지식인들을 일깨우는 데 일조하였다.
― 신필균, 「김철과 사회주의인터내셔널」 중에서
1965년이 군사쿠데타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였다면 1975년은 소위 10월유신, 또 다른 쿠데타와 월남 패망 등으로 한국 사회의 표면이 온통 반동으로 물결치던 때였다. 이때 그는 「통일사회당의 역사적 임무」라는 글을 발표하여 사회주의정당인 통일사회당은 첫째 우리 겨레를 떳떳한 국민으로 살게 하는 것, 둘째 권력의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사회의 일원으로 살게 하는 것, 셋째 온 이웃이 가난에서 해방되며 고루 잘사는 국민, 사회에 능력껏 이바지하는 슬기로운 일꾼으로 살게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떳떳한 국민으로 살게 하겠다는 것은 물질적 가치보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주의자의 투철한 신념을 토로한 것이다. 온갖 떳떳치 못한 수단을 쓰더라도 물질적 성취만 이룩하면 그것이 모든 잘못에 대한 면죄부로 통용되던 박정희 정권 말기, 물질만능 사조 속에서 가난하더라도 떳떳한 국민으로 살자는 것은 당시의 한국 정치로선, 그 가치관과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용감한 주장이었다.
― 임종철, 「투철한 사회민주주의자 김철」
그의 사상이 그러했겠지만, 그래도 합법적 정당의 당수를 했던 분인데 보수 정객들과 달리 그는 평생 청빈하게 살았다. 그의 청빈은 그의 정치사상에 연유하기도 하겠으나, 우리의 전통적 선비 정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는 철저한 보편적 민주주의자이면서 한국적 선비였다. 그의 깨끗한 삶은 바로 그의 사상의 실천이요. 이것은 그의 삶이 그의 생각의 거울이었음을 뜻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토록 청빈했기에 아름다운 정치인은 별로 없다. 정치는 곧 부패의 재생산 행위로 인식되는, 악취 나는 우리 정치 풍토에서는 그의 삶 자체가 신선한 향기라 하겠다.
― 한완상, 「민족적 민주사회주의라로 일관했던 김철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