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희망으로, 단절에서 연결로, 대립에서 공존으로
무너진 교실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지혜
교육 문제를 논하다 보면 거의 어김없이 ‘입시’라는 걸림돌에 부딪히게 됩니다. 입시는 뽑고 뽑아도 또 자라는 잡초 같은 애물단지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문제에 집중하면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톱 밑 가시가 그렇습니다. 가시를 빼겠다고 어설프게 주변을 파헤치면 살이 심하게 곪아 터질 수도 있습니다.
해법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보니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관점을 달리해서 근본을 살펴야 합니다. 바로 입시(入試)가 아니라 입지(立志)를 보는 것입니다.
입지란 ‘뜻을 세우다’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신이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러한 생각을 해보고 꿈과 비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 <1장 ‘입시가 아니라 입지’> 중에서
우리가 교육문제를 꼬이고 엉킨 실타래로 인식하는 바람에 교육 중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표면만 뜯어 고치거나 새롭게 겉포장만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교육 현장은 실타래가 아니라 교과과정, 학생평가, 대학입시와 더불어 생활지도, 학생인권, 교복, 급식, 교원양성 시스템과 교권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요소들이 서로 세밀하게 연결된 거미줄 같습니다. 각 요소들이 사방팔방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거미줄은 어느 부분도 잘라내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거미줄 한 부분을 건드리면 연결된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거미줄은 바람이 불어도 잘 버텨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미줄은 중심이 매우 잘 잡혀 있으며, 그 중심에는 밖으로 당기는 원심력을 잘 지탱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미줄 중심을 보면, 굵은 줄로 촘촘하고 강하게 매듭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거미줄 중심이 거대하거나 주변을 압도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중심은 텅 비어 있으며 그저 모두를 연결해 주고 조율해 줄 뿐입니다.
― <2장 ‘교권 회복을 위한 세 가지 통찰’> 중에서
왜 학교는 정을 붙이기 힘든 곳이 되었을까요? 학교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학교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사람이 교육자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정이 없는 것은 그냥 기분만이 아니라 실제로 학교가 무정한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교육 목표가 인지적, 정의적, 심리행동적 영역이라고 배웠지만, 즉 ‘지정체’라고 배웠지만 막상 학교 현장에서는 ‘지덕체’를 내세웁니다. 정의적 영역이 송두리째 빠졌습니다. 실제로 학교에 ‘정(情)’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정’ 영역의 교육 목표가 사라진 곳에 인정이 베풀어지고 사정이 헤아려지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활발한 소통과 좋은 관계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공감력이 배양되지 않는 곳에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갈등이 판을 치게 됩니다.
― <3장 ‘정떨어진 학교는 비정상’> 중에서
학교는 이제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도록 회복탄력성을 가르치고 지도해야 합니다.
회복탄력성이란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인내심으로 견디어내거나 깡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내적 힘을 길러서 성장동력으로 승화시키는 기술입니다.
어릴 때 가르쳐준 양치질이 평생 치아 건강을 지켜주듯이 학창시절 배운 회복탄력성이 평생 정신건강을 지키게 도와줍니다. 양치질 가르치는 시간이면 회복탄력성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학교는 이미 빽빽한 교과과정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심각한 중독에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학생들의 머리가 터지도록 꽉 채우는 ‘수능시험’이라는 중독입니다.
― <4장 ‘회복탄력성을 가르쳐야 할 시간’> 중에서
학교에 마음을 다치거나 마음이 상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서 ‘감정양호실’을 제안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다치거나 상처받을 때, 시나리오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교실에서 아이가 친구와 말다툼하다 속상해서 울어버린 경우입니다.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다른 친구들은 헤죽헤죽 웃으며 우는 아이를 은근슬쩍 놀립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같이 놀다가 기분 상할 때도 있는 법이니 그만 울라”고 합니다.
이런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신체에 난 상처는 응급처치를 하는 시스템이 되어있지만, 마음에 난 상처에 대한 응급처치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몸 상처만 챙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상처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이들의 정서적인 면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감정밴드를 붙여주어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마음을 보호해 주어야지요
― <6장 ‘감정 상처를 응급처치할 감정양호실’> 중에서
마치 보호는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과보호는 쓸데없고 해로울 수 있듯이 배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 배려는 필수지만 과배려는 에너지를 과도하게 상대에게 쏟아부은 상태입니다.
어디까지가 배려고 어디서부터가 과배려인가요?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행동을 보는 게 아니라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행동은 같더라도 나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을 도와주고 있는데 내가 기분이 좋으면 배려고, 내 마음이 불편하면 과배려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나는 그 행동을 의무적으로, 억지로, 할 수 없어서, 해야 하니까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행동을 하면 과배려 받는 상대방이 기뻐할 리 없습니다. 나 또한 힘든 나머지 불만스럽고, 불평하고, 뒷담화하고, 하소연하게 됩니다
― <8장 ‘과배려하지 마세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