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있어 장애물과 방해 세력은 기본값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고상하게 글을 쓰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나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쓰고자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작가들이, 작가들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장례식장에서, 신혼여행지에서, 키즈 카페에서,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과 버스, 비행기에서, 아픈 와중에도 그냥 썼습니다. 쓸 시간이 없다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신 말입니다.
글 쓰기 좋은 날은 없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날이 좋은 날입니다.
- 〈작업실 만들기〉 중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작가의 눈으로’ 책을 읽어야 합니다. 꼭 그 책이 유명하거나, 걸작이거나, 권수가 많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범한 계란프라이를 먹으면서도 셰프의 시선으로 요리를 감상하는 것이죠.
‘이 계란프라이를 만든 사람은 무슨 계란을 썼을까? 크기와 등급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을까? 올리브오일일까? 포도씨유일까? 왜 이만큼 구웠을까? 서니 사이드 업, 오버 이지, 오버 미디엄, 오버 하드 중 어떤 타입일까? 소금과 후추가 뿌려져 있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양일까? 끝을 태우는 건 어떤 맛을 낼까? 결과적으로 이 프라이는 맛있나? 추천하거나 다시 먹을 만한가?’
- 〈작가의 독서〉 중에서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생각해 보세요. 빌딩이든 헬기든 비행기든, 언제나 톰 크루즈는 몹시 위급한 상태로 어딘가에 매달려 있지 않던가요? 이런 광경을 보면 누구나 이 장면과 상황 속으로 빠져듭니다. 작가는 독자를 ‘낚는(hook)’ 데 성공한 것이지요.
간혹 보면 첫 장면에 독자를 정중하게 초대하려는 분들이 계세요. 아닙니다. 독자의 멱살을 잡고 끌고 오셔야 합니다. 유혹하든 낚시하든 강제하든, 들어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 〈서술과 플롯: 이야기의 구슬을 꿰는 법〉 중에서
바퀴벌레를 두려워하는 주인공을 다시 불러보겠습니다. 맨 처음 주인공은 아마도 바퀴벌레의 흔적만을 볼 것입니다. ‘혹시 이 집에 바퀴벌레가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겠지요. 그 작은 두려움조차도 지금의 주인공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다 한 마리를 목격합니다. 큰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집을 살피다가 두 마리, 세 마리를 발견합니다. 나중에는 열 마리 넘는 바퀴벌레들이 모여 있는 광경도 봅니다.
어디까지 갈까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이 바퀴벌레로 가득 찬 방을 지나가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방금 한 입 베어 문 빵 속에서 바퀴벌레 반 마리가 나오게 하는 장면도 좋겠죠.
- 〈서술과 플롯: 이야기의 구슬을 꿰는 법〉 중에서
어느 날 아기 토끼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친구들이 자기 귀가 크다고 놀렸다는 거예요. 엄마 토끼는 아이를 달래면서 말합니다. “네 귀가 뭐가 크니? 이렇게 귀엽고 아담한데.” 아기 토끼는 금세 기분이 좋아집니다. “엄마, 근데 나 귀가 간지러워.” 그러자 엄마가 말합니다. “그래, 어서 가서 삽 가지고 오거라.”
이 이야기는 엄마 토끼가 지닌 이상적인 이중의 태도-한편으로 아이를 위로하고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메타인지를 놓지 않는-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쓴 소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내가 쓴 글이니 당연히 소중하게 보듬어야죠. 하지만 귀지를 파야 할 때 그 귀에는 삽이 필요하다는 객관적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작품을 사랑하는 일과 그 장단점을 아는 일은 양립 가능합니다. 서로 모순되지 않아요. 분명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요.
- 〈합평과 퇴고: 듣고, 고르고, 다시쓰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