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불러내며 이 글을 쓰는 지금, 인생은 아름다워라.”
나는 내 첫사랑에게 웃음을 주었고,
두 번째 사랑에게는 눈물을 주었고,
세 번째 사랑에게는 그 오랜 세월
침묵을 주었지.
내 첫사랑은 내게 노래를 주었지,
두 번째 사랑은 내 눈을 뜨게 했고,
아, 그런데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
―사라 티즈데일, 「선물」 전문
시에서는 마지막 세 번째 사랑에 방점이 찍혀 있다. 웃음과 눈물 뒤에 오는 침묵. 내가 그에게 오래된 침묵을 주었더니 그는 내게 영혼을 주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내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내 영혼을 내게 돌려준 이는 그이야.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이는 그이야. 그러니 소중하지 않겠는가.
― 1장 ‘하루 종일 내 사랑과’ 중에서
네 인생을 살아라,
젊거나 늙거나,
저 참나무처럼,
봄날엔 밝게 타오르는
황금빛으로 살다가;
(…)
나뭇잎들이
기어이 다 떨어지고
봐라, 그는 서 있지
나무의 몸통과 가지
벌거벗은 맨몸의 힘으로.
―알프레드 테니슨, 「참나무」 부분
짧고 간결하지만 인생의 깊은 뜻을 전해주는 영시. 테니슨의 「참나무」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행의 “벌거벗은 맨몸의 힘”이 주는 얼얼한 충격에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노년을 이렇게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보다니. 어떻게든 늙지 않으려, 늙어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시대, 21세기는 가히 안티에이징(anti-aging)의 시대라고 해도 무방하리. 시의 힘이 대단하구나. 자연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힘.
― 2장 ‘지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아도’ 중에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김승희, 「장미와 가시」 부분
“눈먼 손으로” 삶을 만진다는 발상이 독특하다. 그냥 손이 아니라 하필 “눈먼 손”일까? 욕망에 눈이 멀어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들. 무한 경쟁의 정글에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가시에 찔리게 마련. 금방 잊고 다시 먹고 자고 가시투성이의 온몸에 기름을 바르며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장미꽃이 피기만 하면 고통을 잊을 텐데. 꽃을 피우느라 눈이 멀어……. 내가 나를 찌를 때가 가장 아팠다. 남이 찔러서 생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데, 내가 나를 찌르면,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아파해야 괜찮아질까.
― 3장 ‘적당한 고독’ 중에서
컴퓨터를 끄고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느 소년도 총을 내려놓고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몸은 서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최영미,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부분
2005년에 출간한 시집 『돼지들에게』에 실린 시. 이 시를 쓸 무렵 나는 혈기왕성한 사십 대였고, 길을 가다 공이 내 앞에 굴러오면 공을 차고 싶어 발이 근질거렸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는 문단 권력에 대해 분노했다. 지금은 그때처럼 정의에 민감하지 않다.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에 대해 적대감을 느낄지라도 적당히 감추는 법을 알며, 설거지를 하다 말고 축구를 보러 텔레비전 앞으로 뛰어가지도 않는다.
― 4장 ‘가장 좋은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