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중에서
“이 소중한 날을 기록으로 남기며, 아껴 쓰고 싶다.
지금의 날들을 ‘잘 쓰기 위해, 이렇게 매일 쓴다.’”
나는 토지문화재단과 스페인 문화체육부가 협정한 ‘교환 작가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2022년 8월 31일부터 두 달간 마드리드에 머무르게 됐다.
스페인 측에서 제공한 숙소와 식사는 두 달간 유효하고, 그 후 보름은 혼자 여행을 하고 귀국하기로 했다.
타국에서의 경험은 제때 쓰지 않으면, 그 기억이 일상의 무게에 납작하게 눌려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과거에 체험했기에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다.
(……)
이 일기를 꾸준히 쓴 건, 어쩌면 쓴다는 행위가 적어도 내게는 살아갈 구실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살아갈 이유를 근사하게 둘러댈 변명거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
본문 중에서
“소담한 뒷길로 가니,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마덕리의 아침이 상쾌했다”
마침내 나도 허리를 숙이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몸을 좌우로 흔드는 사이클 라이더가 됐다. 바람을 가르며 마덕리 시내를 질주하는 내 모습을 뿌듯하게 상상하고 있으니, 직원이 조심스레 사진을 한 장 찍자 했다. 방금 전까지 내 직업이 소설가라는 대화를 나눈 사실로 미뤄보아, 그가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한 걸로 추정됐으나, 나는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를 둔 작가처럼 겸손하게 답했다.
“사진이라니요. 저는 그냥 글만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내 말에 젊은 직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노노노노노. 마드리드에는 자전거 도둑이 많습니다, 쎄뇨르(선생). 구매한 사람을 자전
거와 함께 인증샷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선생이 자전거를 도난당했을 때, 경찰이 이 사진을 보고 선생이 자전거의 원래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큰 혼돈의 세계로 잘못 진입한 느낌이다.
- 9월 2일
서반아인들이 왜 필수적으로 낮잠인 씨에스타를 취하는지 이해됐다. 씨에스타를 취하지 않고서는 몸이 취해 오후를 버텨낼 수 없는 탓이다. 게다가 해가 밤 9시에 떨어지니, 이토록 긴 하루를 감당할 수 없다. 저녁을 밤 9시에 먹고 늦게 자지만, 일어나는 시간은 다른 나라와 같다.
결국 매우 잠이 부족하다. 서반아인들의 열정적인 삶의 방식은 밤잠의 단축을 낳았고, 열정적으로 사람을 사귀고 싶은 마음은 낮술 문화를 낳았기에, 결국 한잔을 걸친 점심 후에는 잠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씨에스타를 취하지 않을 수가 있나. 이 시간에는 은행이며, 관공서며 모두 문을 닫는다. 거국적으로 꿈나라에 가는 시간인 것이다.
- 9월 8일
내일이 마침내 클래스 진급을 결정하는 시험 날이다. 불안한 마음에 뭘 공부해야 하는지 잔뜩 질문하니, 선생께서 다시 한번 “개원 역사상 낙제생은 없었어요”라며 안심시키려 했다. 나는 ‘그래. 그럴 거야!’라며, 혹시나 해서 “학원이 생긴 지 얼마나 됐죠?”라고 물으니, 선생이 당황하며 학원은 작년에 개원했다고 답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 지금도 별로 없다. 그러니, 달리 말하자면, 시험을 친 학생이 별로 없는 것이고, 이는 또 달리 말해 통과한 학생도 몇 안 되는 것이다.
두뇌 회전과 눈치가 빠른 수시는 내 눈에 스치는 불안을 파악하고, “초이! 쁘리메로!(이봐 최 씨! 첫 낙제생이야!)”라며 독일식 농담을 했다. 그러며 혼자 웃었는데, 베를린을 떠난 지 8년이 됐건만 여전히 독일식 유머에 고통받고 있다.
- 9월 22일
소설가가 서반아어 공부를 해서 어디에 써먹을 건가. 어학 자격증을 제출해서 승진을 할 건가, 무역상사에 취직을 할 건가. 아니면, 명망 있는 출판사에서 “아, 최민석 씨. 마침내 C1 레벨에 도달했군요!”라며 문학상을 준단 말인가. 오히려, 소설 집필을 못 해서, 문학적 궤도에서 멀어질 뿐이다. 그럼, 대체 나는 왜 서반아어 따위를 공부하려는가.
그건, 돌이켜보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건 언제나 금전적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순수한 즐거움만 바라며 삶에 무용한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은 언젠가 보상을 전해준다.
- 10월 1일
희한하게도 서반아어로 “너 어디에 가봤니?”라고 물을 때는 ‘가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고, ‘알다’라는 동사인 ‘Conocer’를 쓴다. 즉, 이런 식으로 묻는다. “너 포틀랜드 알아?” 이게 포틀랜드에 가봤냐는 뜻이다.
물론, 처음엔 이 질문의 의도를 몰라 이렇게 답하곤 했다.
“포틀랜드에 가보긴 했는데, 잘 알지는 못해.”
그러면 상대는 말한다.
“아니, 아까 가봤다며! 그게 ‘아는(conocer)’ 거라니까!”
왜 서반아인들은 여행을 소재로 삼을 때, ‘가다’ 대신 ‘알다’라는 동사를 쓸까. 그건 어쩌면, 이들의 여행 목적이 여행지를 방문하는 데 있지 않고, 그곳을 제대로 아는 데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왜 서반아인들이 그토록 “너 베를린 알아?” “너 도쿄 알아?” 하고 물었는지 이해된다. 그렇기에 마드리드에 왔지만, 아직 마드리드를 잘 모르는 나는, 몸은 도착했지만 영혼은 도착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도착하길 바란다.
- 10월 2일
중년의 쓸쓸함은 돈 버는 기계가 된다는 생각에서도, 주름이 느는 모습에서도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선생이 없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더 이상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가르치려 하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시간과 돈을 들여 배우지 않으면, 과거에 쌓아놓은 얄팍한 정보와 경험에만 의존해 살아간다. 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훈련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사는 삶이다. 그렇기에 40대 중반이 된 나는 새벽에 꾸벅꾸벅 졸면서까지 온전히 내 삶의 일부를 공부에만 쏟고 싶은 것이다.
행여나 수험생이 이 글을 읽는다면 “아니, 아저씨.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알코올과 휘발성 강한 대화, 그리고 겸손한 단어로 자기애를 감춘 수사만 넘치는 만남에 지친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몸과 영혼을 축내며 시간을 몇 년씩이나 허비하다 보면 내 갈증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일을 하는 와중에 짬을 내 공부해야 하지만, 이 시기는 삶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10월 19일
브래드는 3년 차 마드리레뇨(마덕리人)답게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파스(기본 안주)야!”
안주 두 접시와 小짜 생맥주 두 잔이 7.5유로라니!
나와 히셀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브래들리 선배님!” 하며 경의를 표했다. 하여, 기분 좋게 각자 음식 한 접시와 생맥주 한 잔을 해치웠다. 그리고 추가로 맥주 大짜 두 잔을 주문하니, 또 음식 두 접시가 나왔다.
그나저나, 맥주를 주문했는데, 왜 또 음식이 나온 건가? 그렇다. 이곳은 맥주를 한 잔 주문할 때마다 안주가 한 접시씩 나오는 곳이었다. 즉, 안주가 서비스가 아니라, 맥줏값에 포함된 것이다! 세 번째 주문할 때엔 맥주만 달라 했는데, 안주를 포함해서 줄 때보다 고작 1유로 쌌다. 맞았다. 알고 보니, 브래드는 영국 호구였던 것이다.
결국 가재는 게 편이요, 초록은 동색이었던 것이다(그가 그토록 싼 걸 따져서 찾은 곳이 안주를 끼워 파는 맥줏집이었다니!) 그의 몸에도 호구의 피가 흘러 동족인 나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순간, 우리는 친구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몰려온다.
- 10월 20일
바 의자에 앉아 지역 생맥주인 알람브라 라거를 한 모금 들이켰다. 확실히 더운 나라에서는 청량감을 주는 쌉쌀한 라거가 제격이다. 사실, 서반아에 와서 맛있게 마신 맥주는 대부분 라거였다. 이참에 최고의 라거 맥주를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주저 없이 마드리드 맥주인 ‘마오우 클라시카’를 꼽겠다.
맛도 훌륭하거니와, 이렇게 말하면 마드리레뇨(마덕리인)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반아에서는 일단 앉으면, 라거로 목부터 축이는 게 바람직하다.
-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