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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이방의 풍경과 타인의 얼굴, 경계를 허무는 네 편의 이야기

저자
정선임 , 김봄 , 김의경 , 최정나 지음
출간일
2025년 03월 28일
면수
220쪽
크기
126*187
ISBN
9791167141095
가격
17,000 원
구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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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도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말로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방의 풍경과 타인의 얼굴, 경계를 허무는 네 편의 이야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해외여행자 수가 늘고 경계를 넘나드는 만남의 기회가 잦아졌다. 그러나 안온할 줄 알았던 세상은 전쟁과 테러, 파시즘으로 얼룩지며 다시 한번 평화를 위협받고 있다. 인종과 성별, 문화와 종교의 차이로 갈등과 혐오가 깊어지는 이 시점에, 네 명의 한국 여성 소설가가 ‘나와 이방’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였다. 젊은작가상, 수림문학상, 중앙신인문학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정선임, 김봄, 김의경, 최정나 작가가 스케치한 경계 너머의 삶과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포르투갈 리스본, 인도 벵갈루루, 태국 방콕을 거쳐 사이판까지. 먼 땅의 풍경과 내 안에 숨어 있던 낯선 모습을 포착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첫 번째 작품은 포르투갈 리스본을 배경으로 한 정선임의 「해저로월」이다. 퇴사 후 스페인으로 떠난 수정은 아버지로부터 고모의 유해를 모셔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고모 미경은 떠돌이 삶을 살다 5년 전 포르투갈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머물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간 수정은 게스트하우스 주인 클라라를 만난다. 고모가 남긴 흔적을 좇으며 소설을 써나가던 수정은 마침내 고모가 선택한 삶과 그녀가 믿었던 기적의 의미에 점차 다가서며 진정한 믿음과 삶의 의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 작품은 인도 벵갈루루를 배경으로 한 김봄의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이다. 벵갈루루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한 소설가 유소영은 프랑스 동성 부부, 미국 페미니스트 소설가, 카슈미르의 무슬림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과 함께 생활한다. 인종, 국적, 성별, 문화의 차이로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서로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이들은 끝내 화합할 수 있을까?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을 그려낸다.
세 번째 작품은 태국 방콕을 배경으로 한 김의경의 「망고스틴 호스텔」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자 다영은 남편 병승과 방콕으로 떠나고, 망고스틴 호스텔에 머무르며 한국인 소녀 지유와 예나를 만난다. 생활고로 인해 짠순이가 되어버린 다영은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는 두 소녀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본다. 태국의 대규모 물놀이 축제 ‘송끄란 축제’에서 사상사고가 일어난 날, 다영은 실종된 두 소녀를 찾아 나서는데……. 생계와 생존을 둘러싼 우리 삶의 모양은 망고스틴처럼 딱딱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하거나 씁쓸하다.
마지막 작품은 사이판을 배경으로 한 최정나의 「낙영」이다. 저마다의 부모에게 버림받은 해원과 낙영은 사이판으로 보내진다. 고립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낙영은 부모를 향한 증오심과 해원과의 불가해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사라져 실종된다. 해원은 한때 자신의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러나 너무나 빠르게 잊어버린 낙

영을 떠올린다. 작품은 기억과 망각 사이를 표류하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네 명의 여성 작가가 각자의 독특한 시선과 상징적 서사로 이방의 풍경을 그려낸 이 소설집은 단순히 포르투갈, 인도, 태국, 사이판이라는 국경 너머의 지리적 공간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장소란 인간이 단순히 머무는 공간이 아닌, 관계 맺음과 세계성이 형성되는 장이다. 장소적 개념을 넘어, 타자(他者)의 존재로 확장해 ‘이방’의 의미를 다각도로 탐색하는 이 소설집은 세계 곳곳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관한 여러 가능성의 서사를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저자 및 역자

본문 중에서

“동풍이 곧 끝난다. 상관없다. 다시 남풍이 불어올 테니까”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난징의 진회강에서, 에콰도르의 에스메랄다 해변에서,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에서, 프라하성 안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서 주웠거나 그곳에 남겨진 것들이라고 -남겨진 것들이라는 말을 할 때 미경은 조금 슬퍼 보였다 - 했다. 수정은 낯선 지명들을 따라 발음했다. 미경은 수정의 어설픈 발음에 웃으며 비닐봉지 안에서 과일 말린 것을 꺼내 입에 쏙 넣어줬다. 떠나던 날, 커다란 여행 가방을 열고 뒤적이던 미경은 수정의 손에 작은 돌을 쥐여주며 말했다. 행운을 가져다줄 거야.
오늘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호카곶에 가기 위해 호시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트라에서 내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버스를 탔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날렸다. 커다란 기념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간신히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탑에는 위대한 시인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 땅이 끝나는 곳, 다시 바다가 시작되는 곳.
저 바다 너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 정선임, 「해저로월」 중에서



“한때는 언어가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가야즈의 검지가 먼저 가리키는 것은 주둥이가 긴 누런 개였다.
“굿다! 굿다!”
“굿다?”
“굿다!”
다음은 느직느직 걷고 있는 소, 그다음은 담장 위에 앉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개는 굿다, 소는 가이, 고양이는 빌리. 가야즈 칸, 유소영.
우리는 개와 소와 고양이와 서로의 이름을 서른 번도 넘게 불렀다. 이름이 입에 붙자 이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가야즈의 차를 타게 된다면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 것도 같았다.
“그거야말로 프레임이야.”
이제는 마무리를 했으면 했지만 앨리스와 모하마디는 다시 여성 인권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은 합이 잘 맞는 프로레슬링 선수들 같았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격하고, 또 반격을 가하면서 보는 이들의 도파민을 끝없이 자극하는, 가장 포르노그래픽한 게임에 열중한 선수들.
- 김봄,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중에서



“물속에서 죽고 싶어. 여기가 우리 아지트니까”
방콕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명소라는 왓 프라깨우 왕실 사원을 방문했다. 복장 규정이 엄격해 민소매 차림은 안 된다는 말에 다영은 병승이 입고 있는 남방을 벗겨서 걸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예의를 지켜야 하는 그곳에서 다영과 병승은 몰래 키스를 한 다음 잡혀갈까 봐 가슴을 졸였다.
왓 프라깨우에서 나온 병승은 다리가 아프다는 다영을 등에 업고 걸었다. 다영은 그제야 신혼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남편의 등에 업힌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연애 시절 병승은 술에 취하면 다영을 업고 달리곤 했다. 다영은 인력거를 탄 것처럼 신이 나면서도 아슬아슬했다. 병승 씨, 조금만 천천히. 그러다 넘어져. 여기서 신호등 건너. 다영은 정신을 다잡고 속도를 조절했다. 사랑이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등을 내주면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
그들은 수영장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한쪽 손을 잡더니 뒤로 팔을 뻗어 만세를 하듯이 누웠다. 그들은 나란히 물 위에 가만히 떠 있었다. 생존 수영을 하는 것 같았다. 지유와 예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물속이라는 듯 편안히 떠 있었다. 마치 물 위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밤새도록 저렇게 물에 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김의경, 「망고스틴 호스텔」 중에서



“해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쪽이 불러냈으니, 그것을 막을 수는 없죠”
낙영은 10년 전 사이판에서 실종되었다. 모두 그가 죽었다고 했다. 해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낙영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나 얼마 전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시신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오듯 불쑥 낙영이 떠올랐다. 낙영이 떠오른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제야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선홍빛 둥근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 한 줄기 붉은빛이 바다를 사선으로 갈랐다. 빛이 사그라들고 청동색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아래 검은 바다가 굼실거렸다. 일대는 어둠에 휩싸였다. 해원은 해안가를 걸었다. 낙영과 함께일 때처럼 맨발로 걸었다. 부드러운 물살이 밀려와 해원의 발을 적시고는 이내 밀려 나갔다. 해원은 밀려왔다가 밀려 나가는 파도에 맞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호흡하며 인력과 척력을, 그리고 우주를 느꼈다. 바다에 이는 물비늘이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처럼 보였다. 해원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 한가운데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 최정나, 「낙영」 중에서

추천사

목차

  • 작가의 말

    해저로월 _ 정선임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_ 김봄

    망고스틴 호스텔 _ 김의경

    낙영 _ 최정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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