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풍이 곧 끝난다. 상관없다. 다시 남풍이 불어올 테니까”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난징의 진회강에서, 에콰도르의 에스메랄다 해변에서,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에서, 프라하성 안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서 주웠거나 그곳에 남겨진 것들이라고 -남겨진 것들이라는 말을 할 때 미경은 조금 슬퍼 보였다 - 했다. 수정은 낯선 지명들을 따라 발음했다. 미경은 수정의 어설픈 발음에 웃으며 비닐봉지 안에서 과일 말린 것을 꺼내 입에 쏙 넣어줬다. 떠나던 날, 커다란 여행 가방을 열고 뒤적이던 미경은 수정의 손에 작은 돌을 쥐여주며 말했다. 행운을 가져다줄 거야.
오늘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호카곶에 가기 위해 호시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트라에서 내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버스를 탔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날렸다. 커다란 기념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간신히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탑에는 위대한 시인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 땅이 끝나는 곳, 다시 바다가 시작되는 곳.
저 바다 너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 정선임, 「해저로월」 중에서
“한때는 언어가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가야즈의 검지가 먼저 가리키는 것은 주둥이가 긴 누런 개였다.
“굿다! 굿다!”
“굿다?”
“굿다!”
다음은 느직느직 걷고 있는 소, 그다음은 담장 위에 앉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개는 굿다, 소는 가이, 고양이는 빌리. 가야즈 칸, 유소영.
우리는 개와 소와 고양이와 서로의 이름을 서른 번도 넘게 불렀다. 이름이 입에 붙자 이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가야즈의 차를 타게 된다면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 것도 같았다.
“그거야말로 프레임이야.”
이제는 마무리를 했으면 했지만 앨리스와 모하마디는 다시 여성 인권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은 합이 잘 맞는 프로레슬링 선수들 같았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격하고, 또 반격을 가하면서 보는 이들의 도파민을 끝없이 자극하는, 가장 포르노그래픽한 게임에 열중한 선수들.
- 김봄, 「우리에게는 적당한 말이 없어」 중에서
“물속에서 죽고 싶어. 여기가 우리 아지트니까”
방콕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명소라는 왓 프라깨우 왕실 사원을 방문했다. 복장 규정이 엄격해 민소매 차림은 안 된다는 말에 다영은 병승이 입고 있는 남방을 벗겨서 걸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예의를 지켜야 하는 그곳에서 다영과 병승은 몰래 키스를 한 다음 잡혀갈까 봐 가슴을 졸였다.
왓 프라깨우에서 나온 병승은 다리가 아프다는 다영을 등에 업고 걸었다. 다영은 그제야 신혼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남편의 등에 업힌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연애 시절 병승은 술에 취하면 다영을 업고 달리곤 했다. 다영은 인력거를 탄 것처럼 신이 나면서도 아슬아슬했다. 병승 씨, 조금만 천천히. 그러다 넘어져. 여기서 신호등 건너. 다영은 정신을 다잡고 속도를 조절했다. 사랑이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등을 내주면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
그들은 수영장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한쪽 손을 잡더니 뒤로 팔을 뻗어 만세를 하듯이 누웠다. 그들은 나란히 물 위에 가만히 떠 있었다. 생존 수영을 하는 것 같았다. 지유와 예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물속이라는 듯 편안히 떠 있었다. 마치 물 위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밤새도록 저렇게 물에 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김의경, 「망고스틴 호스텔」 중에서
“해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쪽이 불러냈으니, 그것을 막을 수는 없죠”
낙영은 10년 전 사이판에서 실종되었다. 모두 그가 죽었다고 했다. 해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낙영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나 얼마 전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시신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오듯 불쑥 낙영이 떠올랐다. 낙영이 떠오른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제야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선홍빛 둥근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 한 줄기 붉은빛이 바다를 사선으로 갈랐다. 빛이 사그라들고 청동색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아래 검은 바다가 굼실거렸다. 일대는 어둠에 휩싸였다. 해원은 해안가를 걸었다. 낙영과 함께일 때처럼 맨발로 걸었다. 부드러운 물살이 밀려와 해원의 발을 적시고는 이내 밀려 나갔다. 해원은 밀려왔다가 밀려 나가는 파도에 맞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호흡하며 인력과 척력을, 그리고 우주를 느꼈다. 바다에 이는 물비늘이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처럼 보였다. 해원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 한가운데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 최정나, 「낙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