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말할 수도, 울 수도 없는 세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림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그런 세계가!
이들의 ‘한’을 합치면 그 힘만으로도 나라 하나는 거뜬히 새로 세울 판인데, 이 한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근대미술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리라고 확신한다. 확신의 근거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조각가 김종영이 말했던 사랑. 그는 “인생에 있어서 모든 가치는 사랑이 그 바탕이며, 예술은 사랑의 가공(加工)”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천은 증오나 시샘이나 분노가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사랑이다. 사람들의 애정이 모이면 힘이 되고, 그 힘이 무언가를 움직이고 가공하리라. 그런 ‘근거 있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을 만드는 데 이 책이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죽음과도 같다”_이응노
오세창을 존경했던 후배 화가 고희동의 회고에 의하면, 오세창은 경술국치 직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와 행동을 은인자중하며 지내다가 기회를 당하면 놓치지 않고 와락 출동하여야 하네. 두고 보게.”
그렇게 그는 은인자중하면서 고문헌을 정리하여 책을 쓰고, 금석학을 연구하여 고전을 복원했으며, 서예와 인장을 대거 수집하거나 손수 제작했다. 한가로이 노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열심히 일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1919년 ‘와락’ 일어나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했고, 그로 인해 2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장 <01 “은인자중하다 기회가 오면 와락 출동해야 하네” _오세창> 중에서
그가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 한 일본인 교수가 하얀 석고상을 가리키며 “이게 무슨 색인가?” 하고 물었다. 고희동은 왜 이런 싱거운 질문을 하는가 싶어서 “백색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석고상을 또 가리키면서 “이건 무슨 색인가?” 하고 물었다. 고희동은 내심 자신을 무시하나 싶어 기분이 나쁜 것을 참으며 마찬가지로 “백색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이 면은 빛을 받아서 희게 보이지만, 그 반대편은 광선을 못 받아 음영이 졌는데 그래도 같은 색으로 보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고희동은 자신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음영법을 처음 배웠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법을 익혔다. 이는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동양화의 시각과는 철저히 다른 접근법이었다.
1장 <02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가 그린 조선인의 자화상 _고희동> 중에서
1977년, 서울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후원자를 얻기도 했다. 박생광이 그에게 먼저 부탁했다. “죽기 전에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니, 나를 도와달라.” (중략)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역사화를 그렸다. 1983년에 <명성황후>를 완성했고, 1985년에 <전봉준>을 그렸다. 다음으로 안중근과 윤봉길을 그릴 참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박생광은 이미 1984년 7월에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화가의 마음은 더 급해졌고,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렸다. 후원자 김이환은 박생광이 후두암에 걸린 이유가 늘 입으로 빨아서 뱉어낸 경면주사 때문일 것이라고 한탄했다. 물감 중에서도 유독 비쌌던 주사(朱砂)를 쓴 후에 박생광은 붓을 꼭 입으로 씻었다. 입안에서 살살 물감을 빨아낸 후 물감 접시에 조심스레 뱉어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물감을 아끼느라고 그랬겠지만, 경면주사의 광물 성분이 암을 유발했던 게 아니었을지. 박생광은 물감까지 아껴가며 후세에 보여줄 그림이 그렇게도 많았나 보다.
2장 <02 몸무게 40킬로그램의 사내는 화폭 위를 구르며 대작을 그렸다 _박생광> 중에서
그래서 지난 2023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렸던 원계홍의 탄생 100주년 전시는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1980년대에 유족이 보관하던 원계홍의 작품을 보고 첫눈에 반한 두 명의 소장가가 있었다. 이들은 40여 년간 작품을 오롯이 보관하다가, 화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그의 작품 100여 점을 세상에 꺼내놓았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전시가 MZ세대의 입소문을 타고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사실이었다. 방탄소년단 RM을 필두로 한 젊은 관객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전시 기간이 연장되기까지 했다.
100여 년 전에 태어나 전쟁과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원계홍의 정신세계를 우리 세대가 이해하기는 도무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화가의 말대로 ‘회화의 본질’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통하는 것일까? 원계홍은 그 사실을 이제라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로지 하나의 길, 그림 그리는 일에 바쳐 이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2장 <05 오직 하나의 길, 회화의 본질을 찾아 삶을 바치다 _원계홍> 중에서
이상하게도 이런 불안과 행복이 뒤엉킨 상태에서 그린 천경자의 1960년대 작품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당시 그녀의 작품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우면서 미세한 불안감으로 떨린다. 이른바 ‘여성적 감수성’이 너무나도 솔직하게 표현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통상적으로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오류’로 치부되던 것들, 즉 연약함, 불안감, 헛된 희망 같은 것이 천경자의 작품에서는 본격적인 주제로 등장했다. 슬프고 청승맞고 부서질 듯 여린 감성이 꿈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마르크 샤갈 부럽지 않은 환상적인 작품들이다.
3장 <06 절망을 여행한 뒤 화가는 자신의 '22페이지'를 펼쳤다 _천경자> 중에서
1976년 늦가을, 최순우가 도쿄에 있을 때 그는 『타임』 도쿄지사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 선생, 미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으십시오. 서울 홍익대 교수이며 최 선생의 가까운 친구 한 분이 오늘 새벽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최순우는 유강열의 급서 소식을 이렇게 들었다. 유강열은 이날 새벽 심장마비로 56세의 생을 마감했다.
유강열의 마지막 연구조교였던 신영옥은 유강열이 죽기 하루 전날 밤, 우연히 신촌 길거리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술 한잔 걸치고 택시를 잡으려는 유강열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유강열은 “너는 열심히 해서 작가가 돼라.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면서, 스스로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나도 이제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
3장 <02 이건희 컬렉션에만 70여 점, 다재다능했던 한국 공예의 개척자 _유강열> 중에서
그는 1958년 《살롱 드 메》에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점차 프랑스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1952년 도쿄에서 보았던 그 《살롱 드 메》에 어떻게든 입성한 것은, ‘집념의 사나이’에게 주어진 정당한 보상이었다. 자크 뷔스(Jacques Busse)라는 《살롱 드 메》 위원이 남관을 높이 평가했고, 남관은 《살롱 드 메》에 거의 매년 초청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런던, 함부르크 등 유럽 유수의 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급기야 그는 1966년 프랑스의 망통에서 열린 《국제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추상 표현주의의 거장인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àpies)가 명예상을 받았던 해에 한국인이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다. 한국 신문에도 이 소식이 대서특필되었고, 이를 기념해 남관의 개인전이 한국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는 1968년에 짐을 싸서 귀국하며 신문 인터뷰에 대고 말했다. “나는 할 일을 하고 돌아왔다.”
4장 <01 파리까지 사로잡았으나 지독히 외로웠던 집념의 한국인 _남관> 중에서
그리고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1967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였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 체제가 견고해질 무렵이었다. 동백림 사건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동백림(東伯林, 동베를린)을 드나들면서 북한과 내통하여 이적 활동을 펼쳤다는 죄목으로, 유럽의 문화예술계와 학계에서 활동하던 인사 194명을 잡아들인 사건이었다.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가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중략)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수차례 법정에 섰다. 어떤 때는 “우리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를 외치며 꺼이꺼이 울었고,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을 때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허무하게 웃었다. 그가 울고 웃던 장면들은 모두 사진으로 찍혀 시대의 기록으로 남았다.
4장 <02 바람 잘 날 없던 질곡의 삶, 그 끝에 그린 것은 공생이었다 _이응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