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_정지용, 「유리창 1」 중에서
여기에 당신이 모르는 시는 없다, 잊고 사는 시가 있을 뿐
누군가에게 색깔의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은 좀 더 오래도록 기억된다는 뜻이다. 색깔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선명한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은 기억의 끄트머리를 좀 더 오래도록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다. 분홍으로, 보라로, 하얀 빛으로, 장미 향기로, 물냄새로, 나무냄새로, 더러는 매콤한 술 냄새로, 바이올린으로, 피아노로, 트럼펫으로…….
이미지는 확실히 언어보다 힘센 뿌리를 가지는 법이어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는 시구의 진정성을 실감케 한다.
— 류근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부분
— 「1장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중에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시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두 올림픽경기장에 모였다. 두서너 개의 주제 중 하나를 선택해 두 시간 안에 작품을 제출하는 식이었다.
쓰면서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제출하면서도 그랬다.
수상자는 5등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다. 3등까지 부르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너무 좋아서 가방에 넣어두었던 번호표를 찾아 꺼냈다.
2등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2등은 시시하니까.
장원도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냉면과 김칫국을 시원하게 먹고 떡 줄 사람의 마음에 대해 깊이 명상했다.
— 진혜원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부분
— 「2장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중에서
숙제하듯 시를 쓸 수야 없지. 노동하듯 쓸 수는 더욱 없는 것이고. 그건 그저 세상에 온 시를 옮겨 적는 일, 그냥 시를 살아내는 일. 숙제하듯 저항을 일삼을 수는 없지. 의무처럼 저항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건 그저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직여지는 일, 그냥 저항을 살아내는 일.
숙제하듯 죽음을 죽을 수도 없는 거지. 노동하듯 죽을 수는 더욱 없는 것이고. 그건 그저 내가 살아낸 삶 안에 본디 머무는 것, 그저 죽음을 살아내는 일. 숙제하듯 살지도 말고, 의무처럼 죽지도 말고, 노동처럼 연애하지도 말 것. 그냥 그것들 모두를 살아낼 것.
— 류근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이성부, 「봄」 부분
— 「4장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중에서
진혜원 : 마이클 잭슨의 ‘히스토리’ 공연을 보면
류근 : 화해와 치유의 에너지! 용서와 위안과 사랑의 언어들이 글썽거리는 세계가 곧 서정시라는 말씀 참 깊게 들립니다. 이 시선집이 부디 이 캄캄한 시대에 외롭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구원이 되는 음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왜 서정시인가요?” -시인과 검사의 대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