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슬픔과 뉘우침을 다 바쳐서 밥상을 차린다”
시집 한 권을 착하게 들고서 을지로 순환선에 올라 한 바퀴 돌고 나면
시집 한 권이 내 가슴에 착하게 옮아져 있고,
다시 시집 한 권을 경건히 들고서 을지로 순환선에 올라 한 바퀴 돌고 나면
시집 한 권이 내 영혼에 경건히 옮아져 있던 시절이 있었다.
내 가난한 청춘이 그렇게 흔들리며 흘러갔다. 장래 희망이 시인이었다.
- 1장 장래 희망이 시인이었다,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중에서
몇 줄 쓰지 않았는데도 시끄러운 문장이 있다.
많은 말을 했는데도 고요한 문장이 있다.
자기 내면과의 시비를 묻어둔 채
세상과의 시비를 일삼는 문장들, 시끄럽다.
- 1장 장래 희망이 시인이었다, <고요한 문장> 중에서
어머니가 우리를 그렇게 키웠을 것이다.
스스로 충만하게 제 삶을 살아내라고.
남에게 팔리면서 결국 스스로 시들어가는 인생을 살지 말라고.
고요히 스스로 평화롭고 거룩하라고.
먼 데서 오는 구원을 위해
자기 내부의 의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생은 공허하지 아니한가.
겨우 못생긴 사과 세 알을 앞에 두고서
이렇게 진지하면 반칙이지 아니한가.
- 2장 이왕이면 힘껏, <제 힘껏 살아내다> 중에서
무게를 버리고 걸음을 늦춰야 한다.
여행지에서 집을 짓는 바보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구름처럼 티끌처럼 한 계절 왔다가는 풀꽃처럼 살아야 한다.
- 2장 이왕이면 힘껏, <무게를 버리고 걸음을 늦추고> 중에서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세월 쪽으로
불가역적 속도로 나는 늙어가고 스러져가겠지
한편 그건 참 다행한 일이로고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점점 줄어든다는 건
내가 나를 저버릴 수 있는 세월이 줄어든다는 건
- 3장 세월이 줄어든다는 건 중에서
이 봄에 나는 늙었다. 쟁기처럼 늙고, 고양이처럼 늙고, 신발처럼 늙었다.
꽃이 피고 몇 번의 비가 내렸으나 나는 그런 것들에 마음을 주지 못하였다.
그리운 사람들은 지상에 여전히 많이 살아남아 있었을까.
나는 문득문득 그들의 이름과 눈빛과 손바닥에 머물던 땀의 점도를 잊었다.
나는 늙기로 작정한 경운기처럼 낑낑 늙었다.
- 3장 세월이 줄어든다는 건, <이 봄에 나는 늙었다> 중에서
이름만 봐도 가슴 뛰는 사람이 있다.
이름만 봐도 가슴 설레고 가슴이 아파오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첫사랑이었으나 짝사랑이었던 소녀의 흰 웃음처럼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이름이 있다.
깨꽃 같은 이름이 있다.
해 질 무렵 교회당에서 울려오던 소녀의 풍금처럼 내 가슴에 노을로 오래 번지는 이름이 있다.
- 4장 사랑 아닌 줄 알아라, <당신의 오래고 먼 이름> 중에서
내가 당신에게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순간
내 온 영혼의 근육을 다 바쳐서
그 발음의 처음과 끝을 다 살아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주셔야 한다.
- 4장 사랑 아닌 줄 알아라, <아침의 언어> 중에서
류근은 지리산 토굴에서 술 머슴살이하고 있고,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은 화천 다목리 감성마을에서 글 머슴살이하고 있을 때 새벽에 실시간으로 화답시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로의 봄을 기다려주었을까. 그 옛날 내가 등록금이 없어서 복학을 못 하고 있을 때 나를 위해 밤새 그림 그려주던 순정 소설가.
“두 점쯤 갖다 팔면 등록금이 될지도 몰라....”
내가 어찌 이 소년의 손을 놓을 수 있으랴.
- 5장 당신 보시라고 <이외수 2> 중에서
“야야, 괜찮나~?”
자다가 봉변을 당한 어머니의 첫마디였다. 야야, 괜찮나~?
폭염 때문에 울 것 같은 순간에도 나는 늘 어머니의 그 한마디가 생각난다. 어떠한 분노나 원망도 없이 아들의 안부를 묻던 그 한마디, 야야, 괜찮나~? 야야, 괜찮나~?
울고 싶은 날 어머니 만나러 삼각산 꼭대기 암자에 오르면, 어머니는 어느새 푸르른 하늘로 새 옷을 갈아입고 내 가슴을 쓰다듬는다. 야야, 괜찮데이~ 야야, 괜찮데이~ 얼른 내려가 밥 많이 먹고 새 힘내서 살거래이~.
빈속으로 올라온 나를 등 떠미신다.
- 5장 당신 보시라고, <야야, 괜찮나?> 중에서
가난은 상처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지난 뒤에도 꼭 흉터를 남긴다. 여름만 되면 흉터가 막 자라나서 우울해진다. 지금 쪽방에서 여름을 나고 있다는 사람들 뉴스를 보면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다. 나 거기서 간신히 여기까지 왔으나 아직도 나는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행여 그들의 불운을 밟고 서 있는 자리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오늘은 하느님도 더워서 울고 계실 거 같다.
- 6장 착하게 살아남는 시간, <오직 여름만 있던 방> 중에서
비 온다고, 눈 온다고, 바람 분다고, 애인 생겼다고, 차였다고, 외롭다고, 그립다고, 슬프다고, 망했다고, 술 마시자고, 아무래도 죽어야 할 것 같다고, 너는 괜찮냐고….
- 6장 착하게 살아남는 시간, <지금이 몇 신데> 중에서
살아갈수록 가난해지는 사람들과, 희망과 전망을 잃은 젊은이들과, 미치지 않고선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노인들이 다 나의 이웃이다. 모국어를 공유하고 있는 공동운명체. 나는 슬퍼하고 또 슬퍼한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 7장 비틀비틀 노래하는 세상 쪽으로, <아무 때나 휘파람을 불었구나> 중에서
진지하고 엄숙하고 근엄한 인간 중에 제대로 뭔가 이룬 놈 본 적 있는가.
나라 팔아먹는 놈들 중에 진지하고 엄숙하고 근엄하지 않은 놈 본 적 있는가.
진지하면 반칙이다.
- 7장 비틀비틀 노래하는 세상 쪽으로, <진지하면 반칙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