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오랜만의 동창들의 모임이었다. 아이들 이야기, 남의 집 부부싸움 이야기가 오갔다. 남편의 자랑만 늘어놓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 영선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결혼 생활에 있어서 여자가 현명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들이 오갈 무렵이었다.
―똑똑하다 해도, 아무리 공부를 잘했다 해도, 세상의 온갖 지혜를 다 가졌다 해도 운명이 더 강해! 운명만큼 무서운 건 없어.
동창들은 데리고 온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과일을 깎고 하느라 아무도 영선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혜완만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영선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행이 무엇인지 모욕이 무엇인지, 생이라는 게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지 느껴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그들에게는 내 말을 들을 귀가 있을 거야.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사실뿐이다」 중에서
“내 말은 우리들은 어머니들이 다른 남자들 앞에서 자주 웃거나 하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자란 남자들이란 말이야. 대한민국의 그냥 보통 남자 말야. 내 말은 그런 뜻이었어.”
“우리들은 어머니들이 그런 걸 보고 자랐어. 다른 점은 말이야, 우리들은 그런 어머니들의 생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거야. 너희 남자들은 그게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거고, 단지 웃음이 문제 되는 게 아니고 말이야.”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 우리들은 그런 세대야. 우리의 어머니들은 딸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생을 살라고 가르쳤고, 그리고 아들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쳤지. 그러니 우리가 부딪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단지 나는 이제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피곤할 뿐이야. 정말 피곤할 뿐이야.”
혜완은 담배를 끄고 머리를 부볐다. 선우도 입을 다물었다. 늦은 오전의 시계소리가 둘의 침묵 속으로 파고들었다. 혜완은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저 오욕의 땅을 찾아」 중에서
“남자 비위 맞추는 게 그렇게 억울했니. 참 그러면서 오래도 버텼다.”
반쯤은 농담 삼아 일부러 말투를 가볍게 하려고 애쓰며 혜완이 물었다. 영선은 혜완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글쎄…… 아까도 말했지만 결혼 생활 어디를 찾아봐도 내가 없었어. 난 한때는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고 꽤 칭찬도 받았던 괜찮은 여학생이었는데…… 그 남자의 학비가 없으면 나는 어느덧 그 남자의 학비가 되고, 그가 배가 고프면 나는 그 남자의 밥상이 되고, 그 남자의 커피랑 재떨이가 되고, 아이들의 젖이 되고, 빨래가 되고…… 그 남자가 입을 여는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이 되어 있었어. 나는 목욕탕 앞의 발닦개처럼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밟고 가도록 내버려두었어.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말야, 난 누구보다 내가 똑똑하고 현명하고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는 여자라고 누가 물었다면 맹세라도 했었을 거야. 우습지 않니?”
영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외로울 때 줄넘기를 하는 여자」 중에서
언젠가 불경을 읽다가 영선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 말 참 좋지? 들어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혜완도 좋다고 말했었다.
―넌 결국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 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에 불과했던 거야.
선우가 말했었다.
그랬다. 영선은 그 말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했었다. 경혜처럼 행복하기를 포기하고, 혜완처럼 아이를 죽이기라도 해서 홀로 서야 했었다. 남들이 다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그냥 잘하려면 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욕심 같은 건 일찌감치 버려야 했었다. 그래서 미꾸라지처럼 진창에서 몸부림치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