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를 다루는 문학에서
이 소설을 넘어설 작품이 있을 것인가
정하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꼭 눌러 감싸며 신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밤새껏 걸어 여기까지 와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그때 구원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암호는 백두산, 한라산, 복창하시오.” “백두산, 한라산.” 지난밤 위원장에게 하달받은 암호가 정하섭의 가슴에 안도의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암호는 곧 생명이었다. 암호의 누설은 조직의 동맥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독립공작을 부여하고 암호까지 하달했다는 것은 당성을 의심하기는커녕 당성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좋은 반증이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신경과민이군.”
정하섭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분명한 어조로 혼잣말을 하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위원장은 사소한 실수로 야기될지 모를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원장다운 주도면밀한 조치였다. 그는 거의 웃는 일이 없이 냉혈적인 침착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정하섭을 불렀을 때는 다소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태가 우리한테 약간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들으시오. 이건 당의 명령이오.” 당의 명령이라는 전제 앞에서 정하섭은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긴장했다. 당의 명령은 ‘사태가 약간 불리한’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취해야 하는 행동은 결정적인 패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하섭은 묵묵히 명령을 수령하는 자세를 지켰다. 명령 앞에서는 그 어떤 이의제기나 회의적 질문이 용납될 수 없다는 불문율 때문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느끼기에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너무나 급박해져 있었다.
—「일출 없는 새벽」 중에서
스무 살 나이가 가까워질 임시부터였으니까 아들의 열 받친 행동거지는 일정(日政) 때부터 시작되어 이미 10년이 가까워 있었다. 일본인 지주한테 대항해서 소작쟁의를 벌이면서 아들은 가도가도 목마르고 허기진 소작농군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반 소작쟁의도 삭신 녹아내릴 매타작에 콩밥신세가 확연한 죄로 정해진 세상에서,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너무나 빤한 노릇이었다. 그것은 맨주먹으로 닛뽄도 휘두르는 순사한테 덤벼드는 것이나 진배없었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성미 급한 나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피걸레가 되어 내던져진 아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며 판석 영감은 제 살이 찢겨나가는 아픔에 떨며 울었고, 차라리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목숨의 구차함이 비통해서 울었다. 축 늘어진 아들을 수십 번 추슬러 업어가며 판석 영감은 피물림하듯 대대로 이어진 소작농의 비애와 운명을 씹었다. 대를 물리는 가난이라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었고, 견디기 어려운 벌이 없었다. 아들은 그 죄를 타고나서 이제 철든 나이가 되면서 그 벌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부지, 지발 암 말도 마씨요. 목심 내걸고 독립운동허는 사람들도 있는디, 뺏긴 지 밥그럭 찾아묵는 일도 못헌다먼 고것이 무신 사내새끼다요. 그라고 우리가 허는 짓이 계란으로 바우 치기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당께요. 그려도 허고 허고 또 혀야지라. 작인 없는 지주놈들도 웂는 법잉께요.”
—「가슴으로 이어진 물줄기」 중에서
“범우, 빨리 피허게. 자네 춘부장 어르신은 몰라도 자네의 안전까지 내가 보장할 수는 없네. 자네한테 이런 말 미리 하는 것은 우정 때문이 아니네.”
그날 밤 꼭 귀신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염상진은 그 느닷없음과 똑같이 아무 설명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염상진은 체포되어 1년 형을 살고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잠잠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금년 3월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가 공포되고, 그 준비가 본격화되자 좌익계 반대폭동이 전국적으로 극렬하게 일어났다. 그때 염상진은 지하조직화되어 있던 부하들을 이끌고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 실패로 7개월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가 밤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과, 그 말하는 품의 당당함으로 보아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형님, 무슨 말이오. 앉어서 차근차근 좀 말해 보시오.”
짐작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김범우는 염상진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나 그럴 시간이 없네. 간단하게 말해서, 마침내 혁명의 날이 왔네. 이번에는 먼젓번 같은 것이 아니라 군인들과 힘이 합쳐진 결정적인 것이네. 그쯤 알고 오늘 밤중으로 피하게. 내 말 우습게 알고 뭉기적이다가 체포되면 그땐 난 모르네. 이만 가네.”
—「민족의 발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