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 방림면 계촌리 2383. 앞에도 산 뒤에도 산이었다. 100미터 앞에 왕복 2차선 지방도로가 있으나 가로수에 가려져 조금만 보였다. 나무가 많아 숲의 공기는 언제나 싱그러웠다. 난주 씨의 오랜 두통과 기침도 애비로드에서 말끔하게 나았다. 경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 보는 풍경인데도 난주 씨는 아침마다 놀라 탄성을 질렀다. 유리는 엄마가 지르는 소리에 놀라 아침잠에서 깼다. 난주 씨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찬탄의 말을 한껏 뿌려놓고 마지막엔 “아, 말도 안 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 말 다했으면서. 너무 많이 했으면서. 가까운 곳에 컨트리클럽과 스키 리조트가 있었으나 애비로드의 손님들은 골프도 치지 않았고 스키도 타지 않았다. 마냥 애비로드에 묵다 가곤 했다. 유리와 함께 진귀한 풀과 꽃을 찾으며 놀았다. 문을 활짝 활짝 열어놓고 난주 씨가 만든 음식을 오래오래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애비로드에서는 프랑스 요리나 음식을 맛볼 수 없다. 호박고지, 시래기무침, 돼지고기활활두루치기, 곰취막뜯어먹은닭찜 같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 「유리 - 여섯 살 될락 말락 한 다섯 살」 중에서
“진짜로 불맛이에요. 불에도 맛이 있어요. 정말. 저는 오전 오후 하루에 두 차례씩 불에다 혀를 갖다 대죠. 오전에는 5초간, 오후에는 6초간. 움직이지 않고. 혀를 불에서 떼지 않아요. 정말 불맛이 있고, 요리하는 사람은 불맛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자의 장난스러운 거짓 통역이었다. 브루스는 진지하게 들었다.
“누구에게나 불맛에 대한 기억이 있대요. 70만 년 전부터 뭔가를 불에 구워 먹었을 테니까요. 불은 위험한 데다 태운 고기는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점점 더 불을 멀리하게 되었겠죠. 그래서 불맛과도 멀어졌겠고. 하지만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지금도 음식에 직접 불을 질러 요리를 하기도 해요. 70만 년을 건너뛰어 달려오는, 아련한 불맛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겠죠.”
이것이 난주 씨의 진짜 말이었다.
“첫날부터 굉장한 것을 먹었어요.” 정자가 말했다.
“대단해요. 불맛 말고도 분명 뭔가 더 있어요. 이렇게 기분이 싹 달라진 걸 보면.”
— 「정자 - 한국이라니, 고마워요」 중에서
“무엇보다 서령 씨를 다른 사람에게, 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거죠. 서령 씨를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어요.”
어째선지 이륙은 그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녹음하면 안 되겠네요. 녹음하면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공개 판매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도 돼요?”
“안 되죠.”
“안 하면 여섯 번째 연속이 끊기는 건데요. 개인 홍보 분야는 대박 못 나고 마는 거잖아요.”
“제가 서령 씨를 살 수만 있다면, 네, 이런 대박이 또 어딨겠어요? 더 무슨 대박을 바라겠냐고요, 참.”
“그런가요?”
“그렇죠.”
— 「서령 - 사랑한다면, 말을 들어줘야 하잖아요」 중에서
난주 씨가 이번에는 고개마저 끄덕이지 않았다.
역시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어지러운 것들이 뒤엉키고 있는 거라고 정자는 생각했다.
정자는 난주 씨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이번에도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찜통 뚜껑을 닫고 싱크볼에 행주를 빨아 조리대 상판을 닦는 난주 씨의 움직임이 정자의 손과 팔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난주 씨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정자는 난주 씨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정자가 난주 씨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은 것은 난주 씨의 낯빛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두워진 난주 씨의 낯빛.
괜찮냐고, 왜 그러냐고 섣불리 입을 열어 물을 수 없었다. 다만 난주 씨에게 다가가면 그녀의 상태를 가까이에서 어떻게든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정자 - 흐린 날의 스트로베리 필즈」 중에서
브루스가 정자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울먹였다.
“말해요, 브루스.”
“눈물이, 응, 다랄……마락.”
“눈물이……나올락 말락?”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요. 괜찮아. 울어, 브루스. 괜찮아.”
브루스가 노인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리고 소침해져 입을 열었다.
“저……옆에 앉아서 좀……울어도 될까요?”
노인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노인의 손을 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 「정자 - 용하마을 조껍데기 막걸리」 중에서
깊은 슬픔에 빠진 우리를 위해 청학리 성지의 떡볶이를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저 난주 씨의 늠름함을 배울 수는 없을까. 방문에 귀를 대고 유리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는 난주 씨를 서령은 바라보았다. 울부짖는 유리에게 이별의 불가피함을 말하면서 떨림 없이 근대를 다듬던 조금 전의 난주 씨를 떠올렸다.
서령은 난주 씨에게서 헤어지는 법을 보고 있는 거였다. 난주 씨는 유리를 담담하게 대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음식 맛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슬픔을 마그마처럼 안았으되 난주 씨의 모습은 태산 같았다.
— 「서령 - 속울움 우는 자에게만 보이는 속눈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