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가 배를 띄워 바다에 나왔으면 작살을 들고 물속을 뒤져서라도 반찬거리는 꿰들고 들어가야잖겠는가. 그것이 어부의 체면이다.
“선장, 한 방만 끄서 보세. 그래도 안주감은 잡어가야 안 되겄는가?”
치영의 말투가 사정조로 바뀌어 있다.
그래서 낚시로 시작된 것이 그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낚싯대를 거두고 투망을 시작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개가 밀려들었다. 계절처럼 찾아오는 게 봄 안개였다. 때가 되면 안개는 봄기운에 겉묻어 스멀스멀 밀려와 푸르른 이랑을 흘러 보리를 패게 하고는, 보리이삭에 보드라운 살결을 스치우다가, 보리가실 끝난 논에 심어진 모가 무릎만큼이나 자라서야 몸을 빼 어디론가 제 길을 흘러갔다. 해서 익숙도 했고, 해 난 뒤의 안개여서 잠깐 그러다 숙지려니 했다.
―「그 무거운 것이 덮칠지라도」 중에서
“인자 우리 넷이는 의형제여이! 서로 피는 안 섞였제만 형제나 마찬가지여이! 긍께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써이!”
비장한 어조로 말하며 정삼이 치영과 수열을 돌아보았다.
치영이, “좋아!”,
“나도 좋아!”, 수열이,
“나도!”, 정삼이 말했다.
치영이 왼손을 들었다가 정삼의 손등을 탁 내리치며, “동근이도!” 했다.
“자, 인자 우리는 쨈매 사형제다이. 쨈매 사형제여, 영원하라!”
―「무인도의 하느님」 중에서
시내가 난리가 아니었다. 등에는 M16을 엇매고 손에는 기다란 진압봉을 든 군인들이 사람들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젊은 사람들만 보이면, 머리통이고, 어깻죽지고, 허리고, 배고, 사타구니고, 장딴지고 간에 무조건 조져댔다. ……치영은 그대로 걸었고, 주춤거리던 형석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뒤돌아 뛰었다. 군인들을 피해 옆으로 비켜서려는 순간 진압봉이 치영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비명소리와 함께 치영은 그자리에 고꾸라졌다.
“치영아!”
—병신새끼. 그대로 내달리지 뭘라고 뒤는 돌아보느냐!
―「땅에는 피, 하늘에는 네온」 중에서
그 동네에 있는 교회를 다니며 그 동네의 학원에서 강사로 십 년을 채운 정삼은 그 동네에 학원을 열었다. ……학원은 차고 넘쳤다. 한 해 겨울방학이 되면 학생 수가 두 배로 뻥튀어졌고, 이듬해에는 새로 건물을 얻어 학원을 확장해야 했다. 정부미 포대에 돈을 담아 집에 부리면 아내는 밤을 새워 돈을 셌다. 나중에는 여직원을 딸려 같이 세도록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 호황이 십 년 넘게 이어졌다. ……그 분위기를 타고 정삼은 시나브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 부자 동네에 빌딩도 두 채 샀고 사업체도 여러 지역으로 확장했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학원 재벌로 통했다. 대한민국 학원가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정삼은 성공한 사업가가 돼 있었다.
―「저 높은 곳만을 향하여」 중에서
수열에게 죽음은 낯설지 않다. 일 년에 너덧 번 만나는 친숙한 사이이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염을 하는 건 수열의 몫이다. 먼저 떠난 친구들도 다 수열이 염을 해 보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단장을 해주는 것이다. 쑥물로 송장을 씻어 수의를 입히고 나서 반함(飯含)을 한다. 저승까지 굶지 말고 가라며 물에 불린 쌀을 나무 숟가락에 떠서, 처음 술 ‘백석’을 입의 오른쪽에, 다음 술 ‘천석’을 왼쪽에, 마지막 술 ‘만석’을 가운데에 넣어 주는 순서다. 수열은 그때마다 죽은 이의 얼굴을 보며 그네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있이 살았든 없이 살았든, 편하게 살았든 힘들게 살았든, 죽은 후의 모습은 한결같이 꽃잠을 자듯 안온해 보이는 것이다.
―「문턱에서」 중에서